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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Jan 30. 2023

주간 씀 모음 25

정체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사라졌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놈의 정체를 파헤칠 이유는 충분했다.

놈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물체를 흔적도 없이 숨길 수 있다. 투명하게 만들거나, 다른 차원으로 전송한다거나 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다. 놈은 투명하거나 아니면 너무 작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소리 등 기타 그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도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이곳에 존재한다. 나는 있어야 할 존재가 없어지는 바로 그 장면을 목격했으므로, 이 사실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다.


  “매일 이상한 만화나 그리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내 꼴을 보다 못한 여자 친구가 한 마디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놈의 정체를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저녁 풍경


  그날은 저녁 풍경 속에서도 따스함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태양은 결국 마지막까지 햇살 한번 비추지 않은 채 모습을 감추었고, 하늘을 빽빽하게 덮고 있던 구름에선 차가운 부슬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꼼짝하지 않았다. 다가올 밤의 어둠이 그대로 자기를 집어삼켜주길 바라듯이. 삭막한 뒷골목 한켠에 쪼그려 앉은 그대로, 작은 담뱃불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

  “미안.”

  네가 말해주지 않으니 그 비밀스런 속마음을 짐작할 길이 없었다. 토해내듯 뱉어낸 단어 하나에 담긴 무게가 내 마음을 짓눌렀다.

  언제나 비밀스런 감정을 홀로 안은 채, 위태롭게만 보이는 네 모습. 내가 다가갈수록 그 모습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주위


  달이 없는 밤이었지만 그리 어둡지 않았다. 반짝이는 별빛이 밤을 조용히 밝혀주고 있었으니까. 하늘을 올려다보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보였다. 우주 전체가 내 주위로 내려올듯한 기분이었다. 듣던 대로 굉장한 장소였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가져온 간이 의자를 펼쳤다. 보라색과 초록색. 살짝 형광빛이 도는 모습이 별빛 아래에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휴대폰으로 좋아하던 노래를 틀고, 가져온 음료수를 잔에 따랐다. 맛있는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대신 운전할 사람이 없으니 이걸로 참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번에는 이곳에서 하룻밤 잘 수 있는 준비를 해 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마침 차박이 유행이라고 하니까.

  내년에도 나는 이곳에 와 있을까. 어째 그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 이번에는 약속이었으니까 왔지만, 미래에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홀로 놓인 의자가 더욱 빛나 보였다. 



짧게


  곤란했다. 이제 한겨울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인데, 날이 생각보다 따듯하다 싶더니 여름처럼 소나기가 내릴 줄이야. 우산도 가방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지금. 왜 급한 상황일수록 세상 일이 이토록 꼬이기 시작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저기요.”

  답답한 상황에 한탄하며 빗속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 누군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비슷한 나와 나이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괜찮으시면 이거 쓰세요.”

  그는 그 말과 함께 자기가 들고 있던 우산을 내게 건넸다. 갑작스러운 호의에 나는 당황하며 거절하려 했지만, 그는 그런 나를 만류했다.

  “아, 저는 괜찮으니까 쓰셔도 돼요.”

  그러면서 가방 안에 짧게 접혀 있는 또 하나의 우산을 가리켰다. 여분의 우산을 내게 준 것일까.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그가 건네드린 우산은 이제 쓸 일이 없어서요, 하고 덧붙였다.

  그 순간, 우산을 받아 든 손에서 확실히 느껴졌다. 서늘하고, 끈적한. 보이지 않는 늪에 손을 집어 넣은 기분.

  아, 그래. 그럼 그렇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방금 받아 든 우산에는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도 꽤 깊은 걸로.

  정말, 왜 하필 이면 이럴 때에. 나는 다시 한번 세상을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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