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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Apr 21. 2023

가게

  한바탕 비구름이 지나간 다음날, 쾌청한 오후였다.

  하늘은 끝없이 푸르렀고, 파릇파릇한 잎사귀로 새단장한 나무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화단에 핀 꽃들은 저마다 화려한 색을 뽐내었고, 따스한 봄바람을 따라 온갖 꽃향기가 꽃씨와 더불어 사람들 사이를 떠다녔다. 

  봄이 한창이었다.

  노인은 거리를 바라보며 가게 앞에 앉아 있었다.

  작고 낡은 가게였다. 균열이 일어난 콘크리트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비좁은 1층짜리 건물 내부에는 온갖 물건이 쌓여 있어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운 창고처럼 보였다. 가게 구석에 놓인 작은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계속 흘러나왔지만, 노인은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늘 그렇듯이 가게 앞에 앉아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간혹 몸을 움직여 기지개를 켜고 가게 주변에 놓인 화단에서 새롭게 핀 꽃을 들여다보았다. 느긋한 일상이었다.

  그 앞을 향해 남자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비록 그 노인에게 말을 거는 것이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일 없는 정당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차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노인의 주변은 피어오르는 봄을 한껏 묘사한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그곳을 향해 성급하게 발을 들이밀어도 되는 걸까. 그런 기묘한 의문이 남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다가오는 남자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찬찬히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이윽고 용기를 내 말을 꺼냈다.

  "바람 좀 넣고 싶어서요."

  그 말에 노인은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가게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머리는 백발이었고, 움직이는 몸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허리는 흔들리지 않고 꼿꼿했으며, 두 다리는 굳건하게 땅을 딛고 있었고, 두 팔에는 튼실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남자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어댑터는?"

  가게 안에서 노인이 말했다. 남자는 "네?" 하고 조금 얼빠진 대답을 했다.

  "바람을 넣으려면 어댑터가 있어야 해."

  남자는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 가만히 예전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런 걸 사용했던 기억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최근에는 필요한 방식으로 바뀐 걸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노인에게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잠깐 좀 보지."

  다시 밖으로 나온 노인에게 남자는 순순히 가져온 물건을 보여주었다. 노인은 거친 손길로 이리저리 눌러보더니 말했다.

  "이거 좀 오래됐구먼."

  사실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보지도 않았고?"

  "오늘 막 받아 온 참이라서......"

  "이건 바로 바람 넣으면 안 돼."

  꽤 오래 방치되어 있던 물건이었다. 간단히 바람만 넣으면 바로 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역시 교체해야 할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노인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타이어 안쪽에 있는 고무가 삭았어. 그것부터 교체해야 돼."

  그 말에 남자는 자신이 가져온 자전거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자전거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타곤 했지만 지금 가져온 것은 예전에 타던 것과 조금 다른 형태였다. 바퀴 폭도 좁았고 손잡이도 안장에 비해 살짝 낮았다. 전체적으로 일반 자전거보다 스포츠용 자전거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아마 이런 종류의 자전거를 로드자전거라고 부르던가. 남자는 그 명칭을 어디선가 들어보았지만 눈앞에 있는 자전거가 그 명칭에 부합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자전거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했다.

  교체해야 한다는 노인의 말을 듣자 그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능하면 크게 손대지 않고 지금 그대로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것이 별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하지만 그런 고집을 부리다가는 바람도 넣지 못해 결국 자전거는 타보지도 못할 처지였다. 남자는 노인에게 말했다.

  "교체해 주세요. 그리고 다른 부분도 이상 없나 같이 봐주세요."

  노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전거 바퀴를 분리해 냈다. 그러면서도 눈썰미 좋게 이곳저곳 확인해서 남자에게 말해주었다.

  "체인도 멀쩡하고, 기어 부분도 멀쩡하고. 브레이크는 닿는 부분만 좀 갈아주면 될 것 같고... 실내에서 보관했지? 비도 안 맞았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남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의 말을 들었다. 다행히도 보관 상태가 좋은지 크게 손 볼 부분은 더 없는 모양이었다.

  "꽤 좋은 자전거인데. 이런 자전거를 타지도 않고 어디에 뒀었나."

  바쁘게 손을 움직이면서도 노인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기다리는 손님이 심심하지 않도록 하는 나름대로의 영업 기술일까. 남자도 딱히 대화를 거부할 마음은 없었기에 순순히 노인의 말에 응했다.

  "사실은 저희 할아버지꺼였어요. 어디서 경품으로 당첨되어서 받아오셨다고 하시던데."

  "할아버지께서 타시지는 않고?"

  "원래 타시던 자전거가 있으셨거든요."

  "그렇구먼. 자전거를 좋아하셨나?"

  "네. 자주 타고 다니셨어요."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노인은 타이어 안쪽에서 고무를 빼내고 새로운 것을 집어넣었다. 남자는 꽃씨가 흩날리는 거리 쪽을 잠시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늘 지나다니던 길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설레는 봄바람이 그 기분을 더욱 부추겼다.

  사실 남자는 노인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전거를 들고 늘 찾아오던 가게였다. 그 시절에는 노인도 남자를 알고 있었다. 학교 가는 길, 혹은 친구들과 놀러 가는 길에 노인의 가게 앞을 지날 때면 여느 때처럼 가게 앞에 앉아 있는 노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했다. 남자가 8년 만에 학창 시절을 보낸 작은 동네로 되돌아왔을 때, 거리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지만 이 낡은 자전거포와 가게 앞에 았아 있는 노인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자와 서로를 알아보던 관계는 조금 변했을지라도.

  그러고 보니 노인은 할아버지와도 친분이 있지 않았던가. 남자는 문득 그런 기억을 떠올렸다.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으로써 무언가 보이지 않는 정 같은 것이 분명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인은 간혹 자전거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지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벌써 두 번째 바퀴를 손보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시 노인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에 대한 것도, 할아버지에 대한 것도. 그러나 남자가 아무리 바라본다 한들 노인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곧 포기하고 다시 화창한 봄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얼마 안 있어 노인은 일을 마쳤다. 그는 남자를 불러 조그만 금속 막대 같은 것을 보여주고 그것이 어댑터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끼우고 공기를 넣으면 되는지 차례차례 설명했다. 남자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3만 원이야."

  남자가 카드를 꺼내 건네자 노인은 그걸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도 그 뒤를 따라 입구까지 들어섰다. 그러자 작은 가게를 가득 메우고 늘어선 자전거의 행렬이 보였다. 남자는 그 낯익은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곳에 자신이 어릴 적 타던 자전거도 함께 늘어서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은 금세 카드를 돌려주었다. 남자가 인사를 남기며 가게 밖으로 향하자 노인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나가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할아버지는 건강하신가?"

  남자는 허를 찔린 듯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어물어물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노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남자는 서둘러 자전거에 올라탔다. 공기를 막 새로 채운 타이어가 부드럽게 체중을 받아 주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노인은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남자가 어릴 적 기억하던 그 얼굴과 꼭 닮은 표정이었다. 그는 노인을 뒤로하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봄이 가득한 거리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노인은 떠나는 손님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다시 거리로 눈길을 돌렸다. 조금 과하게 들어찬 봄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 자전거 타기 좋은 날이구먼. 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갔다. 봄은 어느새 왔던 것처럼 어느새 지나갈 것이다. 노인은 가만히 앉아 그것을 지켜보았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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