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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May 02. 2023

일탈

  게으름을 피우는 꽃봉오리가 한창 늦잠을 즐기고 있는 시기였다. 건조한 공기가 먼지와 꽃씨를 한 움큼씩 들어 나르고 있었고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은 모이지 않고 흩어지기만을 반복했다.

  애매한 계절의 애매한 시간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하윤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저기 올라가 볼래?”

  그녀가 가리킨 것은 도로변에 세워진 기다란 철주(鐵柱)였다. 길이는 주변 가로등의 2배 남짓 되어 보였고, 꼭대기에는 조명 대신 CCTV와 피뢰침, 그리고 사람이 밟을 수 있는 원형 발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다리 보여? 딱 올라가기 좋게 되어 있잖아.”

  그녀 말대로 철주 한쪽에는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걸 동그랗게 두르는 안전 펜스도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확실히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물론 아니었다. 평일 오후에 도시 외곽에 있는 공원까지 나와 노닥거리고 있을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테니까. 학생은 학교에, 직장인은 직장에. 다들 하늘의 색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보내고 있을 시간이었다.

  "일어나. 가보자."

  아무래도 그녀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반대하는 말을 중얼거린다고 해도 그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한숨 쉬며 투덜거리는 내 태도를 그만 둘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일은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보이지 않는 목줄이 끌려가는 사람처럼 하윤의 뒤를 따라 철주 아래로 다가갔다. 머리 위로 사다리의 끝부분이 보였다. 적당히 도움닫기를 하면 손에 닿을 거리였다.

  "자."

  하윤이 손짓했다.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뭐 해. 먼저 가라고."

  "왜 내가 먼저야?"

  나는 아직 올라간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그녀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 치마 입은 거 안 보여?"

  "......"

  뭐라 돌려줄 말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즉......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당연히 안 되지. 빨리 올라가."

  내가 먼저 올라가는 것이 그녀의 마음 속에선 이미 결정된 일이었던 모양이다. 당사자의 의견이 단 한 줌도 존재하지 않는 그 결론에 상당히 많은 불만을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철주 아래에 있는 몇 가지 받침대와 구조물에 발을 딛고 점프해 사다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몸을 끌어올렸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다. 나는 발아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괜찮겠어?"

  "걱정하지 마."

  끙끙대며 올라가는 내 모습을 보고도 그녀는 자신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배어버린 한숨을 내쉬고 사다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 밑에서 으앗,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다보니 하윤이 어정쩡한 자세로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도움닫기를 잘못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도와줄까?"

  "됐어. 혼자 할 수 있어. 빨리 올라가기나 해."

  아무렴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사다리를 올라갔다. 아래에서 그녀가 몇 차례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다리가 크게 흔들렸다. 이제 성공한 모양이었다.

  파란 하늘에 눈이 시리기 시작할 즈음 사다리가 끝이 났다. 그 위를 향해 몸을 힘껏 끌어올리자 평평한 철판이 보였다. 아래에서 보았던 원형 발판이었다. 

  그곳은 생각보다 훨씬 좁고 불안정한 공간이었다. 얇은 철판 아래로 내 몸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발끝으로 전해졌다. 바람은 훨씬 거세게 불었고 먼발치에서 보이는 지상이 아득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난간에 매달리듯이 달라붙었다. 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뒤에서 어깨를 밀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올라온 하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내 옆으로 와 난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며 발아래를 바라보았다.

  "시원하네."

  짤막한 감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경우에는 오금이 저리며 간담이 서늘하다는 표현에 가까운 '시원함'이었지만. 그래도 그녀 덕에 나는 조금씩 여유를 되찾았다.

  공원이 보이고, 도로가 보이고, 건물이 보였다. 그 뒤로 길게 뻗은 땅과 넓은 하늘이 만나는 지평선이 보였고, 그 옆으로 늘어선 커다란 산도 한눈에 보였다. 발아래 둘 정도로 좁지만 눈을 하염없이 돌려 보아도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넓은 세상. 그 모습을 나는 하윤과 나란히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혹시 말이야."

  "응?"

  갑자기 그녀가 말을 꺼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그녀의 표정에서 변화는 없었다. 무언가 따분한 듯한 조금은 새침한 얼굴. 하지만 그녀의 두 눈은 이곳이 아닌 조금 먼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대답했다.

  "많이 아프겠지."

  그녀가 무슨 대답을 기대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내 대답이 그녀를 만족시켰을지에 대해서도. 하윤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예전에 철탑에 올라갔던 적이 있어. 여기보다 훨씬 높은 철탑. 그날은 이런 애매한 날도 아니었어. 세상이 훨씬 아름답게 반짝이던 그런 날이었어. 그날, 나는 철탑에서 떨어졌어. 바람과 공기밖에 없는 허공을 향해, 온 힘을 다해서. 반짝이는 여우비가 나를 휘감고, 부드러운 흙이 나를 반겨주고. 땅에 등을 대고 누워 바라보던 하늘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그때는 정말 온 세상이 나를 축복해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

  하윤은 난간 너머로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그날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이.

  가만히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그녀는 시선을 피하듯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오면 그날이 생각나. 예전에는 높은 곳을 무서워해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는데, 참 신기하지."

  "나는 지금도 무서워 죽겠는데."

  "그럼 지금 한 번 떨어져 봐. 그러면 나처럼 높은 곳이 좋아질지도 몰라."

  "다음에 시도해 볼게. 여기보다 조금 더 낮은 곳에서."

  "겁쟁이."

  쿡쿡, 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드럽다기보다는 조금 거칠고 시니컬한 웃음소리였지만, 오늘은 그런 웃음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한껏 기분이 좋아진 하윤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그녀에게 한쪽을 가리켰다. 넓은 공원의 한쪽 방향을.

  "아."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열심히 손을 흔들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경비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고,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이제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쳇."

  우리는 사이좋게 난간에서 떨어져 사다리로 다가갔다. 나는 먼저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으려 했지만 그녀가 발길질을 하려고 해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변태야. 눈치 좀 챙겨."

  "그랬지 참. 젠장."

  나는 사다리에 발을 밀어 넣고 두 손과 얼굴만 보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먼저 내려갔다고 혼자 도망가면 안 된다?"

  어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윤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혀를 쑥 내밀고는 밑으로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에휴. 나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일탈은 끝이 났다. 그래봤자 흔해 빠진 철주 위에 별 볼일 없는 사람 둘이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만족한 웃음을 짓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것이 자신을 유령이라고 소개한 소녀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냉소적인 웃음이라면 더더욱.

  애매한 계절의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또 하나의 웃음을 남기며 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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