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구찌 안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
구찌의 질주가 놀랍다. 래퍼 릴 펌프가 구찌 제품으로 코디를 하고 부른 '구찌 갱(GUCCI Gang)'은 빌보드 차트 3위에 올랐으며, '구찌/구찌스러움(Gucci-ish)'라는 키워드로 구글 검색이 된 건수는 2017년 패션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했다. 한물 간 브랜드로 불렸던 세간의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는 구찌. 국내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힙한' 브랜드가 되었다. 패션업계 전반의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도 구찌의 화려한 부활은 놀라움을 넘어서 신선한 충격이 되고 있다. 2016년에는 5조 남짓했던 구찌의 매출이 2018년엔 10조를 넘어서며 매출로는 처음으로 명품 중의 명품, 샤넬을 넘어섰다. 심지어 멋지다는 표현을 'It's so GUCCI'라고 말할 정도. 밀레니얼 세대에게 오늘 기분을 물을 때, '구찌'라고 대답한다면, 쿨하고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구찌(GUCCI)는 이탈리아 3대 브랜드 중의 하나로 활약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장인정신과 럭셔리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은 이렇게 대중들에게 많이 사랑받고 있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의 탄생 배경과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구찌가 되었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It's so GUCCI!
구찌의 창립자는 '구찌오 구찌(Guggio gucci)'이다. 구찌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1881년 구찌오 구찌(Guggio gucci)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마을에서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제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고, 점차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영국 런던으로 떠나게 된다. 영국에 위치한 사보이 호텔(Savoy Hotel) 벨보이로 일을 하던 그는 가죽제품에 눈을 뜨게 되고,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와 가죽 전문업체인 '프란지(Feanzi)'에서 가죽을 만드는 공정 기술을 배우게 된다. 사보이 호텔은 워낙에도 유명하지만 구찌오 구찌의 유명세에 따라 런던의 상징이 되어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가죽 제작 분야는 승마이다. 그는 193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승마용 가죽제품을 생산하였고, 부유층이 향유하던 스포츠인 승마가 인기를 얻게 되자 구찌오 구찌 역시 상류층의 사랑과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후 자전거가 유행하면서 그는 가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21년부터 가방을 제작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구찌에서 만들어진 백, 벨트, 구두, 트렁크 등은 입소문을 타 점차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으며, 주 고객층인 상류층의 안목에도 만족할만한 최상위 제품을 만드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53년 구찌오 구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알도와 로돌포는 미국으로 진출하여, 구찌오 구찌의 정신을 이어받아 뉴욕 58번가에 이탈리아 최초의 뉴욕 진출 브랜드로서 구찌 매장을 열게 된다. 구찌 스타일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인데, 전쟁 때문에 가방을 만들 가죽이 부족해지자 이들은 그 대안으로 대나무 소재를 사용한다. 말안장에서 영감을 얻었고, 대나무 손잡이가 특징인 뱀부(Bamboo) 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40년대 후반 선보인 뱀부백은 그리스의 페데리카 왕비,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 영화배우 엘리바베스 테일러 등 셀러브리티 등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큰 사랑을 얻었고, 구찌는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로 급부상한다.
1950년대에 구찌는 안장 끈에서 영감을 얻어 THE WEB(그린-레드-그린) 심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심벌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며 구찌를 뿌리내리게 했다. 현재까지도 구찌라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마크 중 하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린-레드-그린의 삼색 컬러는 베스트셀링 아이템으로, 구찌만의 독특한 디테일로서 자리 잡았다. 핸드백은 물론 벨트와 지갑, 신발, 키링까지.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1953년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7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Aldo, Vasco, Ugo, Rodolfo가 회사를 운영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각기 다른 재능의 네 형제들이 경쟁을 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경영권 다툼으로 인한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며 위태로운 시기를 맞기도 했다.
1951년 로돌프 구찌는 밀라노 몬테나 폴 레오네 거리 5번지에 구찌 매장을 열었고, 2년 후인 1953년 알도 구찌는 뉴욕 58번가에 있는 사보이 플라자 호텔에 구찌 매장을 열었다. 이로써 구찌는 뉴욕에 진출한 최초의 이탈리아 브랜드가 되었다. 뉴욕 진출에 성공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는 이때부터 유명인사와 해외 스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고 밀라노, 런던, 파리, 뉴욕, 홍콩, 도쿄 등 대도시에 당당하게 매장을 오픈함으로써 계속적인 사업 확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한 형제만 잘되면 문제가 생기듯이 구찌가에도 계속해서 경영권 다툼이 일어났다. 형제들끼리 경영권 다툼이 계속되면서 구찌는 무너져 갔고, 마우리치오 구찌는 그의 아내에게 청부 살인을 당하게 되며 비극적으로 다툼의 막을 내리게 된다.
1993년에 마우리치오 구찌가 보유한 절반에 가까운 구찌 주식 지분을 매각하면서 인베스트코프가 회사 전체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고, 구찌 내부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톰 포드를 영입하며 구찌는 변화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톰 포드는 구찌의 이미지를 트렌디하고 영한, 경쾌한 이미지로 변신을 성공시켰고, 디자인 총책임자로서 훌륭한 성과를 냈다. 그는 거리나 나이트클럽에서 얻은 새로운 영감으로 섹시한 가죽 샌들, 스파이크 힐, 테크니컬 디자인에 구찌 특유의 금색 말재갈 문양을 혼합시킨 스타일을 등장시키기도 하였으며, 최첨단 디자인과 구찌 특유의 전통을 혼합해 놓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구찌를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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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구찌는 유럽 언론 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럽 기업 "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톰 포드 이후 패션계에서는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수석 디자이너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 매장 구성과 광고까지 지휘하며 브랜드 전체의 이미지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포지션이 유행하게 됐다. 그러다 2004년 7월, 구찌의 변화를 변화시킨 톰 포드와 도메니코 데 솔레는 구찌를 떠났고, 남성복 디자이너 존 레이, 여성복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파치 네티, 액세서리 라인의 프리다 지아니니로 구성된 3인 디자이너 체제가 시작되었다. 특히 프리다 지아니니가 맡은 액세서리 라인이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얻으며 2006년 그녀는 구찌 전체를 단독으로 총괄하는 디렉터가 된다.
프리다 지아니니의 위력은 엄청났다. 그녀가 구찌를 맡은 후 4년간 매출이 꾸준히 성장해 46%까지 신장했고, 구찌는 2007년 시장조사 전문회사인 닐슨이 발표한 '가장 갖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로 선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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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2014년까지 구찌는 패션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노쇠한 브랜드였다. 구찌의 부활을 패션 업계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신임 CEO로 2015년에 새로 부임한 마르코 비자리(Marco Bizzari)가 구찌의 액세서리 디자이너였던 알렉산드로 미켈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하면서, 구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전의 구찌와는 전혀 다르고, 그 어떤 럭셔리 브랜드와도 유사하지 않은 미켈레의 독보적인 스타일은 패션계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미켈레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후 선보인 화려하고, 빈티지하고, 젠더의 구분이 없는 스타일은 '구찌피케이션(Guccification)'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빠르고, 유니크하게 패션계를 장악해나갔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열광하고, 매출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2018년에는 연간 매출의 60% 이상이 35세 이하 젊은 소비자로 나타났다. 구찌의 연간 재정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도 상반기 매출은 46억 유로로, 2016년 전체 매출이었던 43억 유로를 넘어섰다.
구찌의 이러한 성공은 오래된 브랜드의 고유 이미지를 유연하게 확장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구찌의 기존 핵심 타깃을 변경하고,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발굴했다. 또한 판매하는 제품군에 혁신적인 변화를 줌으로써 화려하게 부활했다. 마르고 비자리는 구찌의 핵심 타깃을 기존의 베이비부버 세대에서 밀레니얼 세대로 바꾸었다. 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밀레니얼 세대의 잠재적인 소비 능력을 인지하고 있지만, 베이비부머 세대보다 경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밀레니얼을 타깃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 자체를 바꾸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반면 마르코 비자리는 아직까지 자신만의 스타일을 대중에게 뚜렷이 선보인 적이 없는 무명 디자이너인 알렉산드로 미켈레를 선택함으로써 브랜드를 재탄생시키고 밀레니얼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날개 없는 추락을 겪고 있던 구찌는 파격적인 변화를 꾀해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로써 큰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명품의 역사를 알고 그 브랜드의 제품을 사용할 때,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 구찌의 화려한 도약은 명품계에서 큰 충격이 되었다. 브랜드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목표와 패션 트렌드를 따라가야 한다는 목표는 늘 충돌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난제를 새로운 방향으로 해결해나가는 구찌의 모습에서 명품 브랜드들이 늘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시장과 소비자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한 브랜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아이덴티티 전략이 필요하다. 핵심은 유연성과 확장성이며, 브랜드 아이덴티티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전통성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적 요구를 적절히 반영하는 유연성이 필요할 것이다. 브랜드의 고유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와 호흡하고, 변화한 브랜드 환경과 스타일을 전달하는 구찌. It's so GUC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