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오픈런? 이유가 다 있죠.
며칠 전 샤넬 오픈런이 검색어 1위를 차지했던 때가 있었다. 백화점 명품관이 오픈하기 한참 이른 아침 6시 반 정도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있고, 매장이 오픈하자마자 샤넬을 향해 달려나가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샤넬 가격 인상에 앞서 제품을 구매하려고 온 이들이었다. 샤넬 공식 홈페이지의 가격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며, 가격 인상이 될거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샤넬코리아가 핸드백 등 제품 가격을 최소7%에서 최대 17%까지 인상한다고 공식 발표하며 샤넬 오픈런이 이슈가 된 것이다.
샤넬이 '샤테크'가 되는 이유
샤테크를 하는 이유는 뭘까, 오늘은 파리 패션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 샤넬에 대해 알아본다.
코코 샤넬의 손길로부터 탄생된 샤넬 브랜드는 칼 라거펠트의 지휘 아래 시대 트렌드에 적응하며 성장했다. 칼 라거펠트의 죽음 이후 샤넬 하우스를 이끌어갈 세 번째 리더, 비르지니 비아르는 과연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되고있다.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가브리엘 샤넬을 수도원에서 상장하여 재봉사로 일을 했다. 그녀는 '코코'라는 닉네임으로 밤에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후 작은 모자 가게를 운영하며 자신감을 얻은 코코 샤넬은 1910년 파리의 뤼 캉봉에 첫 부틱 '샤넬 모드'를 열었는데, 이 역시 큰 성공을 거두면서 1913년 도빌에 새로운 부틱을 오픈했다. 이 곳에는 모자 말고도 다양한 의상들이 채워졌는데, 부드럽고 편안한 저지 소재로 주로 제안된 샤넬의 카디건 형 재킷, 짧은 스커트들은 당시 코르셋과 페티코트를 받쳐입으며 정형화된 모습에 갇혀있던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주는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실용성과 활동성을 원하는 여성들이 샤넬 의상을 더욱 찾게 되었고, 이에 부티크를 점차 늘려가던 샤넬은 1921년, 전설적인 샤넬의 첫 향수 'N° 5'를 선보였다.
샤넬을 방문하는 고객들을 위한 선물 정도로 만들었던 이 향수는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 코코 샤넬은 이 사업을 확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전문 경영인인 피에르 베르타이머와 손을 잡은 그녀는 'N° 5', 'N° 22'를 비롯한 다양한 향수들과 메이크업 라인, 스킨케어 화장품을 런칭하며 사업을 확장시켜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닥치며 매장 한 군데만 남기고 정리한 샤넬은 자신의 살롱 문을 닫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코코 샤넬은 리츠 호텔에 살고 있었고, 그 곳은 곧 파리 나치 사령부 본부가 되었는데, 코코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교제를 하면서 나치에 적극 협력했다. 그녀의 옛 애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친구인 처칠 수상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나치 공작에도 적극 가담했다. 종전 후 코코 샤넬의 이러한 행위가 밝혀지면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 결국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다. 망명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리츠 호텔에서 살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무려 1937년부터 37년간 리츠 호텔에 장기투숙한 셈이다.
이후 패션계로의 복귀 기회를 찾던 샤넬은 동업자였던 베르타이머와 만나(베르타이머 가문은 현재까지 샤넬을 경영하고 있다) 1954년 꾸뛰르 하우스를 재 오픈하고 컬렉션을 발표했지만 샤넬을 향한 이미지가 굉장히 나빠진 데다, 이미 파리는 가느다란 샤넬 룩과 대비되는, 여성의 실루엣을 다시 과장시킨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이 휩쓸고 있는 때였다. 이러던 중, 코코 샤넬은 산업 발달에 의한 기능성을 부각함은 물론, 여성의 학력 향상, 직업여성과 경제력 증가, 여성의 스포츠 참여 기회 확대 등으로 나타난 여성 라이프 스타일의 모던한 변화를 읽어내 장식성을 배제한 활동적인 슈트를 제안했다. 새롭게 탄생한 샤넬 수트가 미국에서 호평을 받으며 재기의 불씨를 키우게 된 샤넬은 다이아몬드 모양 퀼팅 백에 가죽과 골드체인을 엮은 어깨 끈을 연결해 여성들의 손을 자유롭게 해준 2.55 백을, 그리고 앞 코는 블랙, 바디는 베이지 색상으로 배치해 발은 작게, 다리는 길어 보이도록 만든 투톤 슬링백 슈즈 등을 내놓으며 디자인 혁신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코코 샤넬은 1971년 결국 눈을 감았고, 샤넬 하우스는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크리스찬 디올 출신의 디자이너를 영입하거나, 내부 디자이너들을 승격 시키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브랜드의 쇠퇴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스타 디자이너로 떠오를 칼 라거펠트가 눈에 들어왔고, 독일 함부르크 출신으로 파리 패션계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끌로에와 펜디에서 활약하고 있던 그는 샤넬로부터 러브콜을 받아 '아트 디텍터'직 제안을 수락했다.
이후 1983년 가을 시즌의 오뜨 꾸뛰르 컬렉션부터 맡게된 그는 무리한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닌, 샤넬 클래식에 주목했다. 샤넬의 초창기 시절인 20,30년대 스타일을 가져온 것이다. 기본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그의 컬렉션은 파리 패션계가 다시 샤넬에 대한 기대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이어 발표된 레디 투 웨어 컬렉션에도 호평이 이어지며 샤넬 브랜드의 르네상스가 싲가되었따. 특히 알파벳 C를 겹쳐 만든 로고를 적극 활용하기로 한 그의 선택은 샤넬 브랜드 이미지를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냈다.
라거펠트의 활약 속 샤넬 하우스는 1984년에 마담 샤넬의 이름을 딴 향수인 '코코'를 내놓으며 향수 산업 확장을 재개하고, 시계와 주얼리, 아이웨어 라인을 추가로 런칭했다. 광고 캠페인의 촬영도 직접 맡으 라거펠트는 독일 출신 모델 클라우디아 쉬퍼를 뮤즈로 발탁했으며, 이를 통해 샤넬을 보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로 변모시켰다.늘 단정하게 묶은 흰 머리와 블랙 선글래스, 목 끝까지 잠궈 입는 화이트 셔츠, 블랙 수트로 대표되는 그는 독특한 스타일과 거침없는 인터뷰로 연일 화제가 되며 패션 아이콘으로도 사랑받았다. 그 덕분에 샤넬 하우스는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글로벌 패션 마켓에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그러나 2019년 2월, 칼 라거펠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지며 세계 패션계는 충격에 빠졌다. 샤넬 하우스는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비르지니 비아르가 수습해주기를 바랬다. 그녀는 라거펠트의 오른팔이라고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1987년 샤넬의 인턴으로 입사한 그녀는 오뜨 꾸뛰르 컬렉션을 준비하는 자수 공방에서 일을 시간하고 이후 30여년간 라거펠트와 함께 일했다. '스튜디오 디렉터'라는 직함을 부여받고 본격적으로 샤넬에서의 입지를 다지던 중 2019 가을 시즌 레디 투 웨어 컬렉션 발표를 앞둔 시점에 갑작스럽게 라거펠트를 떠나보냈다. 이 후 그녀는 실용적인 유틸리티 재킷과 컬러풀 니트, 통이 넓은 크롭 팬츠 등으로 가볍고 캐주얼한 분위기를 낸 그녀는 여기에 트위드 재킷이나 퀼팅 백 등 샤넬의 클래식 아이템들을 적절히 매치시켜 샤넬의 오랜 고객들을 안심시켰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여성스러워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보다 젊고 경쾌해진 무대를 펼쳐 박수를 받았다.
코코 샤넬과 칼 라거펠트가 그랬듯 비아르 역시 자신의 스타일이 컬렉션에 투영될 수 밖에 없는 만큼, 층이 진 긴 머리와 테일러드 룩을 선호하는 그녀의 영향으로 샤넬 하우스는 시크한 파리지앵의 향기가 짙어질 전망이다. 또, 한편으로는 빈티지 작품들로 전시회를 열고 공방 프로젝트를 통해 장인 정신을 지켜가는 등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노력도 놓치지 않으면서 파리 패션을 대표하는 라벨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코코 샤넬의 영광을 다시 살려내 찬사를 받았던 칼 라거펠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파리 패션계는 크게 술렁였다. 이 후 비르지니 비아르에게 권력이 이양되면서 그 충격은 완화됐는데, 이젠 비아르 시대의 새로운 샤넬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변천사를 가진 샤넬의 가치가, 며칠전 또 한번의 가격 인상으로 이슈가 되었다. 워낙에 가격대가 비싸게 형성된 브랜드이기 때문에 최소 7%에서 최대 17%의 가격 인상이면 하루만에 몇 십, 몇 백만원을 벌 수 있다. 일명 샤테크(샤넬+재테크)는 끝을 모르는 가격 인상에도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든든한 수요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