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함께 기대되는 프라다의 행보
화려함을 꿈꾸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를 보지 않은 사람도 괜찮다. 스포일러를 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그저 이 영화 속에서 프라다는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하며, 이러한 프라다의 가치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어떤 이들이, 어떻게 발전시켜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프라다의 이미지는, 전문적이면서도 고귀한 이상을 의미한다.
'프라다, 샤넬, 루이비통' 이렇게 세 브랜드는 온 세계가 다 아는 명실상부 럭셔리 명품 브랜드 Top3이다. 그런데 프라다를 입기 위해서는 왜 악마가 되어야할까. 이 이야기는 프라다의 설립에서부터 시작해야할 듯 싶다.
프라다는 1914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되었다. 마리오 프라다(Mario Prada)와 마르티노 프라다(Martino Prada)형제가 세운 가죽 잡화점인 프라텔리 프라다(Fratelli Prada)로 시작이 되었다. 프라텔리 프라다(Fratelli Prada)는프라다 형제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프라텔리 프라다 시절, 완전한 초창기에는 최고급 가죽 가방과, 가죽 악세사리 제품, 그리고 영국 등 해외에서 수입한 트렁크 가방을 판매했다. 이 때, 당시에 진귀한 물건들을 많이 수입해 팔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 귀족들, 유럽 상류계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브랜드를 오픈하자마자 진귀한 제품들을 선보이며 빠르게 성장했다. 1919년에는 이탈리아 왕실에 공식적으로 가방을 납품하게 되며, 오늘까지 프라다의 상징으로 쓰이는 로고도 이 때 이탈리아 왕실로부터 수여받았다. 로고에는 사보이 왕실(Royal House of Savoy)의 문장과 매듭이 포함되어 있다.
초기에 마리오 프라다는 여성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사업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오, 매장 안에 여성의 출입을 제한했고, 프라다의 비즈니스를 마치 남성의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 중에 마리오 프라다의 사업을 물려받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1958년, 마리오 프라다가 세상을 떠나며 딸인 루이자 프라다(Luisa Prada)가 프라다를 물려받게된다. 그의 바람대로 후계자였던 아들이 사업을 물려받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세계 2차 대전과 시기가 맞물리며 특별한 행보 없이 프라다의 20년이 그저 흐르게 된다.
지금의 프라다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프라다의 성장을 이끌어낸 마리오 프라다의 손녀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그녀는 1949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루이 프라다의 딸로 태어났으며, 따로 패션 디자인을 배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7년, 브랜드 경영권을 이어받으며 패션 분야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만큼이나 독창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프라다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디자인이나 스타일을 디자인 팀에 전하고, 그 다음 차근차근 소재와 재단법을 함께 찾는 방식으로 프라다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사실 1970년대 후반 프라다는 파산 직전에 놓였었고, 그녀는 프라다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프라다의 부흥은 현재 프라다 CEO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77년 미우치아 프라다는 국제 가죽 박람회에 참석했다가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를 만나게 된다. 당시 베르텔리는 프라다의 모조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으며, 화가나게 된 마우치아가 따졌지만, 베르텔리는 오히려 프라다의 사업 확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모조품이 진품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정교하게 잘만들어진 것을 보며 미우치아 프라다는 놀라게된다. 패션계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있는 베르텔리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챈 미우치아는 그를 사업 파트너로 결정하게되고, 훗날 프라다의 동업자이자 그녀의 남편이 된다. 이 부부는 2006년에는 타임지에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커플' 100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1979년에 미우치아는 군용 물품 공장에서 낙하산용, 텐트용으로만 사용되던 포코노 나일론 소재를 이용하여 심플한 디자인의 백팩을 완성한다. 당시 가방은 당연히 가죽이라는 생각이 만연했는데, 그녀는 이 틀을 깨부순 것이다. 이 소재는 무엇보다 가벼우면서도 튼튼했고, 굉장히 실용적이었다. 포코노 나일론을 이용하여 출시된 백팩과 토트백 세트는 전 세게 백화점과 부티끄에서 판매될 정도로 반응이 좋았고, 이를 통해 프라다의 재기가 성공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프라다를 알리게 된 제품은 바로 이 포코노 재질의 나일론 가방이다. 세계적으로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면서 우리나라에도 히트를 치게 된 상품이기도하다.
이후 프라다는 1983년에 밀라노 부티끄를 런칭하고, 다음해인 1984년 파리를 시작으로 마드리드, 플로리다, 뉴욕 등에 추가로 부티끄를 런칭했다.
1985년, 프라다는 나일론 천을 소재로 사용하여 클래식 핸드백을 선보인다. 이 제품은 심플하면서도 높은 실용성으로 출시 첫날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1987년, 우먼스 기성복 컬렉션을 출시하면서 명품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졌다.
프라다를 또 다르게 유명하게 만들어준 사피아노 가죽. 이 사피아노 가죽 또한 역시 프라다의 새로운 신기술이자 발명품 중 하나이다.
두 가방을 성공적으로 출시하여 사람들의 많은 호응을 얻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프라다가 완성되었다. 이후 90년대에 들어 브랜드 대형화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993년도에 세컨드 브랜드 미우미우(MIU MIU)를 런칭하게된다. 미우미우는 10대에서 20대 여성들을 타겟팅한 디자인으로 '미우'치아 프라다의 애칭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프라다 런웨이는 모델들이 가장 서고싶어하는 워너비 쇼라고 한다. 20년 넘게 모델 트렌드를 잡고 있으며, 다른 많은 브랜드들이 프라다쇼에 선 모델들을 섭외하고자 한다고. 프라다와 마이젤이라는 사진작가, 이탈리아 보그가 함께하고있으며 막강한 캐스팅 디렉터들 때문에 모델계에서 파워가 세다고한다. 무엇보다도 무명 모델이 발탁되어 프라다 쇼에 한번 서면, 다른 브랜드에서 알아서 모셔간다고 하니 그 영향력은 말해봐야 입아프다.
올해 4월부터 프라다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된 세계적인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Raf Simons)가 주목받고있다. 미우치와 프라다와 공동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라프 시몬스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오랜 친구이자 비즈니스적으로는 좋은 동료이다. 그는 미니멀리즘의 대가, 변화를 추구하는 몽상가 등의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거대한 브랜드로 성장한 인물이다.
앞으로 프라다의 행보가 기대된다. 늘 새로움을 보여주고자하는 프라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만큼 앞으로도 더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제품을 많이 선보여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