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스토리를 파헤치다
나이키는 필 나이트와 빌 바우어만이 공동 창업해 만든 브랜드이다. 필 나이트에 대해 먼저 설명하자면, 그는 원래 육상선수였다. 세계적인 감독인 빌 바우어만에게 코치를 받았지만 필 나이트는 곧 자신이 육상에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후 필 나이트는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하여 신발 산업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는데, 무거운 쇠 스파이크가 달려있는 독일제 운동화보다 일본의 합리적인 가격대의 기능성 운동화가 거의 독점이었던 미국 운동화 산업을 바꿀 것이라고 주장하는 보고서였다.
필 나이트는 학위 취득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니츠카 타이거사의 운동화에 대한 미국 내 독점 판매권을 획득했다. 1964년, 아버지에게 빌린 50달러를 가지고 품질 좋은 저가의 일본 런닝화를 수입하는 회사, 블루 리본 스포츠를 설립한다.
필 나이트는 오니츠카 타이거사의 샘플 신발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육상 신발에 관심이 많았던 빌 바우어만 감독에게 보내며 동업을 제안했고, 자신이 고안한 신발 디자인을 오니츠카 타이거사에 제공하자는 의견도 제시했다.
자동차에 신발을 가득 싣고 다니며 신발을 판매했던 필 나이트는 사람들이 매일 밖에 나가 몇 마일씩 달리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본인이 파는 신발이 달리기에 더없이 좋은 신발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필 나이트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공감하여 신발을 구매했고, 블루 리본 스포츠는 설립 첫 해에 약 8천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1965년 표준적인 근무 시간에 적응하지 못한 제프 존슨은 하루도 빠짐없이 필 나이트에게 편지를 써서 블루 리본 스포츠의 정직원으로 고용시켜달라고 했다. 결국 필 나이트는 제프 존슨을 고용해 회사의 관리 업무를 맡겼다. 젊은 시절 촉망받던 육상선수 우델은 전신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필 나이트는 그 또한 블루 리본 스포츠의 일원으로 고용했다.
빌 바우어만은 초창기부터 끝까지 늘 신발 연구에 몰두했는데, 그 결과를 종종 오니츠카에 보내기도 했다. 그는 1966년에 오니츠카의 제품인 스프링 업의 아웃솔이 버터처럼 녹아들어 가는 것에 문제점을 느꼈다. 그래서 오니츠카의 중창을 럼버 업이라는 제품의 바닥창과 함께 녹여 장거리 선수용 트레이닝화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으로 만들어진 운동화는 매우 훌륭했고, 블루 리본 스포츠와 오니츠카 타이거는 함께 제품명을 고민한다. 빌 바우어만은 1968년에 열리는 멕시코 올림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그 신발의 이름은 아즈텍 으로 짓기로 했는데, 그에 아디다스는 본인들이 먼저 출시한 상품 이름이 아즈테카 골드라는 이유로 소송을 하려고 했다. 바우어만은 아즈텍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고, 그 담당자의 이름이 코르테즈라고 하자 제품명을 코르테즈로 정해버린다.
1971년 필 나이트는 당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 중이던 캐롤린 데이비스에게 단돈 35달러로 나이키의 로고 제작을 의뢰하게 된다. 필 나이트는 로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품 생산 시간상의 문제로 채택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우리가 곧 잘 말하는 나이키의 로고 ‘스우시’이다. 스우시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게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는데 그것은 곧 나이키의 심볼이 되었다.
1972년부터 블루 리본 스포츠가 독자적인 제품을 생산하면서 오니츠카 타이거사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결국 블루 리본 스포츠는 오니츠카 타이거사와의 협력 관계를 종료하고 독자적인 브랜드 ‘나이키’를 만들었다. 그 후 나이키는 오니츠카 타이거의 납품 업체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코르테즈 개발 이후, 빌 바우어만은 나이키의 첫 번째 운동화를 신고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를 찾았다. 그는 그의 제자인 육상 선수 스티브 프리폰테인을 최초로 후원하며, 이후 나이키는 자사의 제품을 육상 선수들에게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1970년대 미국에 조깅 열풍이 불며 운동화를 전면에 내세웠던 나이키는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80년 중반 나이키는 미국 시장에 불어온 에어로빅 열풍을 예측하지 못 해 에어로빅 운동화를 출시한 리복에게 선두자리를 내주게 된다. 리복을 견제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나이키는 1984년 NBA 시카고 불스 소속 신예 선수 마이클 조던에게 농구화 및 의류에 대한 후원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후 1985년 마이클 조던을 위해 에어 조던 원을 개발했다. 그 후 조던이 에어 조던 원을 착용하고 화려하게 그라운드를 누비며 시카고 불스의 황금기를 맞이함과 동시에 나이키 운동화 판매율이 급상승했다.
1988년 ‘JUST DO IT’ 이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캠페인을 시작하는데, 이 캠페인으로 기존의 딱딱한 나이키 광고를 벗어난 유머와 감성, 스포츠맨십까지 잡은 광고를 진행하게 된다. 운동화는 프로 선수나 마니아들만 선택하고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 성별 등을 뛰어넘은 누구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알리고자 스포츠를 즐기는 기존 성인 남성에 더하여 여성과 청소년을 끌어들였다. 그 후 이 캠페인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캠페인이 진행된 10년간 운동화 부문 시장 점유율을 18%에서 43%로 성장시켰다.
이후 나이키는 30주년 광고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뜻으로 국가가 나올 때 무릎을 꿇었고, 이로 인해 팀에서 방출된 콜린 캐퍼닉을 모델로 발탁하여 밀레니얼의 공정함, 저항에 지지를 얻어 약 4,300만 달러의 광고 효과를 가져갔다. 나이키는 시대가 원하는 공정과 정의라는 키워드를 그들의 브랜드에 접목하여 시대에 발 맞추지만 뻔하지 않은 길을 지금까지도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