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과외를 했다. 처음엔 주변 어른들이 아들 딸을 가르쳐 주라는 부탁에 따르는 정도였다. 그러다 점점 그룹 과외, 개별 과외, 과목별 과외를 하며 오후 시간은 학원 종일반 강사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전공도 교육 쪽이라 경험도 쌓고, 학비를 벌며 대학 생활을 한다는 뿌듯함에 정말 열심히 가르치고,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복수전공까지 하며 많은 학점 이수를 위해 대학 생활에 취업 준비를 병행하며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까지 어떻게 했나 싶다. 힘들지만 힘든지 모르고 힘을 냈던 시간들이었다. 오히려 즐거웠고, 걱정 없이 행복했으며, 체력적으로도 버틸 수 있는 때였다.
기록하고 싶은 생각들이 태산 같지만 오늘 이야기할까 하는 건 대학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학원 강사 시절,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또는 공부를 당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개인 과외를 할 때가 있었다. 학원에서 별도로 개인 과외반을 배정받아 수업을 진행했다. 학원 근처 동네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중소형 병원 원장 아들이 내 학생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부모의 부와 명예, 욕심과 강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내 학생이 된 아이였다. 나 역시 학원 강사 경험을 2-3년 지내면서 어느 정도 노련해져서 편하게 편하게 가르치며 과외 수임을 챙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학원 선생이라도, 아무리 그 집안에 돈이 차고 넘쳐 나한테 주는 돈이 별 것 아니라 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 잡히는 과외 시간에 허송세월을 보내기란 내 성격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높지 않은 목표를 잡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솔직히 나의 마음을 말했다.
“나는 선생이지만 나도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공부하기 싫은 네 마음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받고 일을 하는 것이고, 최소한의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따라줘라. 적어도 너의 성적을 이만큼은 올리게 너도 도와줘야 한다.”
뭐 대략 이런 내용을 골자로 허심탄회한 말을 전했던 것 같다. 그렇게 솔직히 마음을 전하는 선생은 없어서였을까. 아이는 한동안 나름 열심히 따라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학과 과정을, 그것도 매주, 매월 단위로 시험을 치며 성적을 주시하던 시절에 약간 달라진 마음가짐과 공부방법으로는 성적을 올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이는 다시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고, 정해 놓았던 진도와 숙제는 쌓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참다 참다 나는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이걸 해 오지 않는다면 손바닥을 때리겠다고 했다.
100대
당시에는 학교에서도 한 번씩 맞았고, 이제 막 체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학원에서는 암묵적으로 매질을 했고, 부모들은 아이의 성적만 오른다면 묵인했다.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하려는 일이 폭력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와 약속한 일이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정말로 100대를 때리겠다고 말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너무나 흔쾌히 때리라고 했다. 여선생이 남학생을 때려봐야 얼마나 데미지가 있겠느냐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전후사정을 내내 보고받아왔기에 내가 하려는 일이 훈육이라 믿어줘서였을 수도 있다.
놀라면서도 다짐을 했다. 내가 이 기싸움에서 지면 이제 저 아이를 가르칠 때 주도권을 뺏기리라. 지금이 너무 중요한 순간이다. 때려서라도 버릇을 고치리라.
실제로 아이는 보란 듯이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내밀며 그냥 때리라고 했다. 진짜 교육적인 목적에서였을까, 어겨진 약속에 대한 분풀이였을까. 나는 내 학생을 때리기 시작한다. 한 10대 쯤 때리니 팔이 아팠다. 20-30대까지는 때려야 하니까, 이것도 약속이니까 때려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여기에 서서 다른 사람을 때리고 있어야 할까.
정말로 원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매질을 멈췄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때리고 싶지 않다. 너를 때리고 있는 내 자신이 미워진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니가 미워진다. 너는 누군가에게 맞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격체다. 그래서 나는 너를 때리기 싫다. 공부,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 하지만 약속을 어기고도 당당한 건 창피한 일이다. 니가 원한다면 수업을 계속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너를 가르치고 싶지 않다.
아이는 고개를 숙였고, 나는 울었다. 아이는 나의 진심을 알아줬던 모양이다. 아슬아슬한 수준에서였지만, 선을 넘지 않는 정도로 내 수업을 따라줬으며 자연히 성적도 약간 향상되었다.
나는 아직도 한 번씩 그 날의 내 감정이 생각난다. 그런 건 훈육도 교육도 뭣도 아니다. 그냥 폭력이다. 그 아이를 변화시킨 것은 매질이 아니었으며, 나의 눈물과 진심이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 순간 나도 아이도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심치 않게 아동학대와 체벌, 학교폭력 같은 일들을 접한다. 생명에 가하는 폭력은 절대 목적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폭력은 그저 분풀이와 미숙함의 발로에 불과하다. 인간성을 상실했을 때 폭력이 이루어진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인간은 부끄러움을 모를 때, 인간이 아니다.
나는 딸 아이를 키우며 딱 한 번 가슴에 사무치게 아이를 함부로 대한 날이 있었다. 20여 평 남짓의 집에 갇혀 독박육아 중에 산후우울증 때문에 이뤄진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해 봐도 나는 안다. 남들은 그 정도를 가지고 뭘 그래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날 나는 이제 막 세상에 나와 의지할 곳이 나밖에 없는 돌쟁이 아기에게 감정적으로 화를 냈다. 왜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냐고, 왜 제멋대로 하냐고, 몸을 흔들고 울게 내버려뒀다. 세상에 돌쟁이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나의 힘든 점을 알아주길 바라다니 제정신인가. 찰나의 순간이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것은 폭력이었다. 꿀밤을 때리거나 매질을 했더라도 그보다 나았을 것 같다. 나는 부끄럽지만 그 날의 일을 잊지 않으려 한다. 사랑하는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내 소유물이 아닌 그 자체로 사랑하는 법은 계속 배워야 하는 일이다.
그 날의 감정을 잊고, 아무 일도 아니라 치부해 버리면 폭력은 거세진다. 무뎌진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럴 줄 몰랐다고 해도 폭력은 폭력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부끄러움을 알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폭력을 멈춰야 한다.
#정인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