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더 가질 수 있을까'에서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연 소득이 50만 달러(한화 6억 6천만 원)가 넘어가면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감의 정도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의 연봉이 약 6억 6천만 원쯤이라면 그 이상 버는 것은 실질적으로 행복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 또한 한계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겠지만
비현실적인 액수의 정도는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정도와 수준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강원도 작은 마을에 사셨던 이인옥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할머니는 어렸을 적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가지 못했고, 성장하는 아이들이 같은 아쉬움을 느끼지 않길 원하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평생 땅을 일구어 돈을 모았고, 없는 살림에도 기꺼이 그 전액을 기부하여 마을에 초등학교를 설립하셨다.
심지어 할머니는 기초 생활 수급비 마저 착실히 모아 기부 하시고 방송국 관계자들에게도 빵을 나눠 먹자 하시는 둥 그 인심을 보이셨다.
이인옥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돈은 똥이야. 쌓이면 악취를 풍기지만, 뿌리면 거름이 되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사도 바울이 떠올랐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목숨을 마다하고 순교의 길에 올랐다.
끝내 그의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을 무렵, 그는 빌립보에 옥중 서신을 보냈다.
“내가 궁핍하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
나는 배부르든 배고프든, 풍족하든 궁핍하든,
모든 형편에 처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그랬듯, 사도 바울은 타인을 위해 목숨마저 나누려고 했고,
그것이 그에겐 죽음마저 불사하게 하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모아둔 돈도 없고, 들어올 돈도 없는 내게 현실의 벽은 무거운 납처럼 차가웠다.
나는 얼마 전 직장 상사의 질타를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퇴사했다.
그 뒤 수입 없는 지출이 나날이 이어지니 그 정도가 감당이 안 됐다.
내 형편에 스스로 화가 났고, 지갑이 가벼워질수록 내 자존감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티브이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주는 웃음보다
입담으로 몇 천만 원을 벌어가는 진행자들에 대한 질투가 먼저 나오는 최근이었다.
하지만 이인숙 할머니의 이야기를 보고, 빌립 보서를 읽으며 생각했다.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당장 우리 집 강아지를 산책시켜 줄 수 있었고
내가 전화해서 다정히 고백하는 말은 우리 가족과 애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으며
직장에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마치며 누군가에게 편의를 선물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눔에 집중할수록, 불편함의 자리에는 감사함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제야 쫓기듯 살며 내가 놓쳤던 소중한 것들을 조금은 볼 수 있게 됐다.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가졌냐’가 아니라, ‘무엇을 나눌 수 있는가’였구나.
그 고민이 나를 움직이는 최근, 나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가진 단 한 톨의 사랑이라도 나누려고 애쓰게 됐다.
나눔이 싹을 틔워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게 될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