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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다윤 Jun 07. 2020

오늘의 시발비용 지출내역서 : 아이팟 나노 3세대

아이팟 나노 3세대 : 165,000₩

       



 시발비용이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용을 뜻하는 신조어다. 회사에서 질책을 당했기 때문에 홧김에 마트에서 맥주를 사거나,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오늘 소개할 내 인생 첫 시발비용 지출금액은 16만 5천 원이다.      


 “이 동생보다 못한 놈.” 기술 선생의 한 마디는 중3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스트레스였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당시 우리 쌍둥이 남매는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중3이었다. 쌍둥이 동생은 반에서 1등, 나는 딱 중간 정도 성적을 받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의 담임교사였던 기술 선생은 내 옆자리 친구가 떠드는 모습을 보고 내가 수업을 방해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떠들지 말라고 주의 주는 정도에서 끝났다면 좋으련만. 스승님께서는 3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동생보다 못한 놈.”을 외치셨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같은 반 아이들의 다양한 표정이 담겨있는 얼굴들로 나를 쳐다보았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나는 청춘영화의 주인공처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맞받아칠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선생님도 회사 다니시다가 해고당하고 기간제 교사로 빌빌대는 못난 선생님이잖아요.”라고 공격할 정도로 잔인하지도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날달걀마냥 줄줄 흘러내리는 내 자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사님께서는 수업을 이어가셨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은 첫 경험이었다.     


 ‘동생보다 못한 놈’ 사건 다음 학기였던 중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에서 나는 반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하고야 만다. 기술 선생의 해임이나 징계보다는 동생보다 못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짜 복수라는 생각으로 칼을 갈았던 결과물이었다. 마지막 학기는 내신반영 안된다며 특목고를 준비하던 상위권 학생들의 이탈에 힘을 입기는 했다만 1등은 1등이었다. 나는 1등에 대한 보상을 주장하며 엄마를 졸라 시리즈 최초로 동영상 재생이 되던 애플사의 아이팟 나노 3세대를 구매하고야 말았다. 당시만 해도 버튼을 꾹꾹 눌러야 했던 mp3가 보편적이던 시대라 손가락 하나로 한껏 멋드러지게 클릭휠을 쓸어 돌리는 감촉은 힐링 그 자체였다. 16만 5천 원을 이른바 시발비용으로 지출하고 나서야 머릿속에 가득했던 모멸감, 분노 이외의 긍정적인 감정들로 채워넣을 수 있었다.     


 내 삶은 아이팟 이후로 좀 더 넓어졌고, 풍성해졌다. 하지만 내가 마이너스 감정들을 플러스로 돌릴 수 있었던 이유는 편리함과 비주얼 때문만은 아니었다. 적자상태의 감정을 흑자로 돌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일등공신은 팟캐스트였다. 지금이야 애플제품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팟캐스트를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2007년만 하더라도 애플유저가 아니면 팟캐스트를 접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아이팟이 없었다면 접하지 못했을 콘텐츠들로 황량한 내 삶의 구색을 조금씩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저서 ‘긍정의 힘’으로 유명한 조엘 오스틴 목사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세뇌에 가까운 정도로 자신감을 끌어올릴 수 있었고, 채식 관련 팟캐스트를 들으며 당시엔 생소했던 디톡스에 대한 개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외 여타 다른 팟캐스트를 통해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동생보다 못하다거나, 수학성적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라는 말 대신 시야를 넓혀주고, 자존감을 살찌워주는 말을 들었다. 아이팟을 사며 16만 5000원을 시발비용으로 지출했지만, 그 이상의 값어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째 아이팟을 신나게 쓰다 보니, 졸업시즌이 다가왔다. 마지막 기말고사마저 끝나고 중학교 졸업식 날 어머니는 백화점에서 산 화장품을 건네며 동생의 담임교사였던 기술 선생 앞에서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우리 집 귀한 아들을 30명 앞에서 동생보다 못한 놈으로 규정하며 참스승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시발비용을 아무리 많이 지출해도 새로운 스트레스는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어디 선생님의 한 마디뿐이겠는가. 대학교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거나,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귀하를 채용할 수 없다는 메일을 받기도 한다. 친구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세상을 창조한 다음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안식을 취하셨다. 불완전한 피조물인 우리는 부지런히 시발비용을 지출하며 회복하는 수밖에. 그렇게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몇천원에서 수십만원까지 다양한 금액대를 시발비용으로 지출하는 삶을 살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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