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촘촘히 엮인 씨실, 날실의 틈새를 파고들어 다리를 휘감는다. 싸늘한 입김을 머금은 공기자락에 살 속에 느릇하게 묻혀있던 뼈 마저도 시린 진동을 한다. 최후의 방어막인양 장착했던 KF 94 마스크도 내외간의 온도차로 응결이 되어버린 물방울로 젖어든지 오래다. 끔찍한 싸늘함… 스쳐가는 정든 풍경을 배신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친 악조건이다. 그래서 찾아 들어갔다. 피트니스 센터를…
두 번 망설이지 않고 한 달 등록을 했다. 코로나가 저어 되는 까닭에 동네에서 제일 허름하고 작은 곳이다. 역시, 운동하는 사람들은 열 손가락으로 헤아려 질 만큼이다. 오랜만에, 외투를, 발열 히팅 내의를 훌훌 떨어버리고 러닝을 한다. 평지를 걸어 다니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강도다. 속옷을 제외하고 상의, 하의를 한 겹만 입고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땀을 통한 발산으로부터 오는 상쾌함이란 ‘쾌’의 감각으로 경의를 표할 만큼이나 짜릿하다. 더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냉장고 안에 잠들어 있는 시원한 맥주가 간절해 진다.
샤워 후 맥주를 딴다. 탄산을 머금은 액체가 내려가는 몸의 행로가 여실히 느껴진다. 온몸으로 촉각하는 맥주의 맛에 매혹되어 금새 캔 하나를 동낸다. 맥주 한 캔 만큼의 흐릿함이 정신을 장악한다. 몇 시간 후면, 나이의 숫자 앞자리에 ‘5’를 달아야 하지만, 여러 셀럽들이 새 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을 울릴 테지만, 그런 것은 별 감흥이 없다. 시간의 궤도를 달리는 세상의 흐름, 작위적인 의식의 제스춰 따위는 내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죽을래요?”
이 한마디에 심장에 균열이 간다. 아마도, 약간의 불안과 망설임을 머금은 그의 목소리 톤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솟아오른 광대뼈를 급히 내려오는 볼의 경사각과 도드라진 턱선이 슬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나를 잃어버린’ 그녀, 그 그늘의 애잔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굳건한 이성의 영역 위로 나른함과 흐릿함의 장막을 드리운 알코올의 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통합되어 나를 정의하는 말의 행간을 솟아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그녀, 그리고 내 파장과의 공명… 표층에 있는 나를 내면 깊숙히 침잠시키고, 웅크리고 숨어 행간으로 존재하던 나를 끌어 올린다.
무실체였던 나의 행간은 ‘위로 받고 싶은 자아’다. 말로 받고 싶은 위로가 아니다. 존재감만으로 위로가 되는 그런 존재. 척박한 나의 그늘을 지켜주는 그런 존재. 죽음의 극단에서도 함께 함을 믿는 그런 존재…
2021년 마지막 몇 분을 남겨두고 톡으로 메시지가 왔다. 친구의 메시지다. “그 동안 수고했어. 토닥토닥.” 뭔가 가슴 밑바닥에서 묵직하게 올라온다. 뜨거운 그것이, 아득한 그것이, 물빛의 그것이 폭발하듯, 눈물이 되어 발산한다. 한참을 운다. 모양 빠지게도 엉엉 소리까지 내어가며 운다. 눈물의 실체를 뚜렷이 가늠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고 또 운다. 발신자가 기질적인 자상함이 있든지, 아니면 나를 특정하여 다정한 포옹을 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 행간이 돌출되어 ‘원초적인 그리움에 대한 절실함을 느끼는 나’인 것이 중요하다. 바로 그 순간 나의 결핍에 딱 들어맞는 조각 하나가 행운처럼 찾아 든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간을 불신한다. 그러나 <인간실격>의 요조처럼 인간을 못 믿어서 불신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온전하게 해 줄, 인간 존재가 있을까’ 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타인은 나의 불완전한 면을 채워 줄 수 없다. 관계에서의 기대와 실제 차이의 괴리는 허무함만 낳을 뿐이다.
2021년 마지막 시간은 나의 불완전한 면, 행간의 나를 끌어안고 스스로를 들여다 본 밤이었다. 뚜렷이 정의할 수 없는 뜨거움과, 위로와, 따뜻함이 비산한 그런 밤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