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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찌 Jun 15. 2020

컵라면과 파김치,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혼자 밥 먹는 시간, 그거면 충분하다


결혼 전 좋아했던 혼자만의 시간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토요일 저녁,

시간 맞춰 막 끓인 라면을 먹으며 무한도전을 보는 시간.

친구들을 만나며 보내는 시간도 즐거웠지만,

바쁜 주말 저녁 집에서 혼자 보내는 여유로운 시간을 특히 좋아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 5년 차가 되었고,

여전히 많이 사랑하는 남편과 봐도 봐도 너무 예쁜 두 아들,

그리고 뱃속에 자라고 있는 소중한 셋째 아이까지.

우리는 완전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만의 그 시간은 기억 속에 묻히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잠깐이라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포기하지 못해서일까,

너무 사랑스러운 내새끼들이지만

끝없는 출산과 육아로 지친 몸과 마음 때문일까.

셋째는 임신 초기부터 경험해보지 못했던 입덧과 극강의 무기력함을 가져다주었고,

매일 남편의 퇴근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텨내며,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던 중 더 이상 안 되겠다던 남편이

혼자 쉴 수 있게 해 준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으로 갔다.

반강제적으로 얻어낸 휴가에 몸은 싹 낫는 듯했고

무얼 먼저 해야 할지 너무 설레었다.


밀렸던 청소와 빨래를 하면서

집안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었구나. 새삼 깨달았고,

몸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흘러 집안일에는 끝이 보였고

여유가 생겨 출출함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그냥 혼자 방해받지 않고 TV를 보며

식사하는 시간을 즐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결혼 전 그날들처럼.



좋아했던 그 프로그램은 종영되었지만

그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토요일 저녁이었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다시 하고 있었으니까.


그 시간을 놓칠세라 얼른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 끓이는 봉지라면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종류의 컵라면과

내 입맛에 딱 맞춰 언니가 만들어 준 파김치까지.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TV를 보며 면발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을 수 있다는 게,

아이가 깰까 봐 소리 죽여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게,

내 식사시간을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게 그저 행복했다.

네 식구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차려 먹을 때와는 또 다른 행복.

그동안 쌓여있던 우울함과 피로가

라면 국물과 함께 싹 내려가는 듯했다.



내가 쉴 수 있게 기꺼이 힘든 주말을 자처한 고마운 남편,

며느리도 없이 손주 둘에 아들까지

싫은 내색 없이 떠맡아주신 감사한 어머님,

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준 소중한 식사시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동안 고생했다고,

앞으로도 힘내서 잘 살아보자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짧은 휴가는 금방 끝났고, 아이들이 돌아온 순간,

고요한 순간이 있었기라도 했냐는 듯

다시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지만,

그 단출했던 한 끼 식사가

그 전쟁 같은 행복한 일상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가끔씩 다시 주어질

엄마의 휴가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보며,

나는 오늘도 하루하루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하루 속에

정신없는 식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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