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딸기 기다리는 중
‘수험표 수집가’라고 할까? 올해만 네 개의 각기 다른 시험을 쳤다. 첫 시험은 4년간 준비해 온, 난이도가 높은 시험이었고, 나머지 세 개는 며칠 집중해서 공부하면 되는 문제은행식 시험이었다. 첫 시험의 결과는 그 뒤로 본 세 개의 시험이 다 합격하도록 공개되지 않고 있다. 시험의 난이도가 더 높을수록 수험생은 더 괴로우면서도 외롭다.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등에 업어도, 결국 나를 증명하는 일은 철저히 혼자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난이도가 낮으면 자기 효능감이 높아지고 자기 확신이 생긴다. (물론 난이도를 믿고 공부를 게을리하다가 ‘떨어지면 쪽팔려서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기는 하다.)
일본에는 ‘딸기쇼트케이크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딸기를 먼저 먹을 것인지 아니면 가장 나중에 먹을 것인지를 두고 개인의 성격이나 인생태도를 설명하는 것이다. 수험표 수집가로서 시험들을 달콤한 딸기쇼트케이크로 비유하자면, 나는 가장 달달한 한 입은 가장 나중에 먹는 것을 선호한다. 가장 퍽퍽하고 입맛에 안 맞는 시험은 가능한 제일 먼저 해치우고 싶다. 그러면 나중에 먹는 딸기는 더 달달할 것이다. 시험장에서 만나는 4지선다 문제가 얼마나 반가운지, 어려운 서술형 문제를 준비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문제를 몰라도 넷 중에 찍을 수 있다는 편안함! 정답일 확률 무려 25%!! 역시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
딸기 같은 그 시험들 중에 두 개는 보험영업을 위해 치른 것이었다. 뜬금없이 보험팔이라니. 내가 일하는 학원의 원장님은 내가 오래 준비하던 그 시험에 떨어져서 다른 생계수단을 물색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글쎄.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합격을 기대하는 상황에서도 뭐든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해봐야 한다고 믿는다. 영업이란 것은 직업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나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영업의 험지에서 겪는 경험은 귀한 경험이 될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갑자기 보험을 팔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결정은 시험 난이도나 진입장벽 높이에 비례했다. 낯선 사람들을 몇 명 만나고 며칠이 지나자 내 이름이 박힌 명함이 생기고 내 이름이 달린 책상도 생겼다.
보험시험과 달리 보험상품은 어려웠다. 그 모순이 이 직업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듯했다. 낮은 진입장벽은 보험영업의 치열함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종종 누군가의 뜬금없는 연락에 ‘저 사람 보험 팔러 오는 거 아냐?’라는 사람들의 농담에서 보험영업의 낮은 지위를 말해준다. 각오를 하고 부딪치면 좀 수월할까 기대를 해보지만, 세상일의 다반사가 그렇듯이 실제 경험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촘촘하고 구체적인 어려움을 보여 줄 것이다.
첫 고객은 2년 전 암투병을 했던 5살 딸아이의 아빠였다. 첫 만남부터 유병자.. 심사거절 사유라니, 열심히 준비했던 것을 거의 아무것도 못해보고 상담은 20분 만에 끝났다.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시작한다는 명확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한 내 모습. 벗어나려고 노력하겠지만 한동안은 그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좀 괴롭다.
두 번째 고객을 만나던 날 오후에는 대치동 학원에서 수업이 있었다. 그날은 일이 좀 많아서 오후 세시부터 밤 열 시까지 연달아 수업을 해야 했다. 그런 스케줄이 있는 날에는 학원에 가는 길부터 마음에 부담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철저히 무기력한 보험설계사를 벗어나 익숙한 학원강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늦은 퇴근에도 한결 수월한 마음이 생겨버리는 게 아닌가. 역시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험을 해봐야 하는 이유는 나에게 명확하다. 세상일들은 서로 묘하게 비슷해서 앞선 경험은 뭐든 양분이 되고, 그중에 비슷하지만 더 수월한 일은 모두 딸기가 된다. 나는 과연 합격할까? 내 인생의 딸기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