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내 아이에 대하여.
림 랜지 감독, 틸다 스윈튼과 에즈라 밀러 주연의 2011년 작(국내 개봉 2012년) <케빈에 대하여>를 보았다. 개봉 당시 국내외 적으로 상당한 호평을 받았던 영화다.
사이코패스니, 소시오패스니 이런 정신질환자를 등장시켜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을 쫓는 형사나 영웅들의 이야기는 드라마 속 단골 소재다. 나 스스로 이런 소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싫다고 하면서도 꽤나 많은 드라마를 챙겨보았다. 모두 자극적이고, 잔인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등장하는 영화였다. 분명히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일부러 찾아보는 수준 아닌가 싶다.
<케빈에 대하여>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사이코패스 아들과 그 엄마의 이야기다. 이미 각종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다양한 사이코패스들의 만행을 보아 왔기에 그런 류의 소재에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있을거라 믿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내 예상을 정확히 빗나갔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엄마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가 마구 교차 편집되어 있다. 불친절한 전개와 영상이 이어진다. 영화는 절대 관객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팝콘을 날름거리며 편안하게 보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 없이 생각하고 의문을 갖게 한다. 이것은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품었던 궁금증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러닝타임은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고, 설마 이제는 무언가 나오겠지 기대했지만 끝까지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않고 냉정하게 크랭크인 화면이 올라간다. 마침내 영화가 끝이났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궁금하다. 그리고 계속 케빈을 생각한다. 누군가와 케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케빈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하여. 영화의 제목이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인 것을 깨닫는다.
케빈은 왜 그런 짓을 했는가. 마침내 엄마가 케빈에게 묻는다.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케빈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케빈 엄마를 향해 묻고 싶었다. 왜 케빈에게 단 한 번도 '왜냐고 묻지 않았는가'에 대해.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그 마음은 모두 똑같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준비 없이, 연습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된다.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했다고 한들 정작 부모가 되고나서야 깨닫는다. 그 숱한 준비와 마음가짐이 실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음을. 케빈의 엄마가 케빈을 사랑하지 않았겠는가. 엄마는 노력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들을 끝까지 참아주었고, 소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음을 관객은 모두 보았다. 그러나 또한 관객은 보았다. 그런 엄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던 아들의 고독한 몸짓과 눈빛을.
그 동안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를 다룬 작품에서는 대부분 그들의 부모에게 먼저 문제가 있었음을 부각시켜왔다. 이런 성향은 유전적인 요소도 있을 뿐더러 그런 부모 밑에서 자식은 학대 당하거나 방치된 채 자라면서 완벽한 사이코패스로 거듭난다. 그런 식으로 살인마에게 서사를 부여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고 어느 정도 동정하기에 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케빈을 향한 부모의 그 어떤 학대와 방치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안전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도시에서 전원으로 이사까지 했고, 아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사 주며 다정하게 놀아준다. 엄마 역시 잘 되지는 않았지만 아들과 소통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했다. 이쯤 되면 케빈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 더 묻고싶어진다. 우리는 케빈에 대해, 그리고 영화에 대해 할 얘기가 참 많아진다.
케빈과 케빈 엄마의 관계와 그들의 소통의 방식을 보면서 부모로서의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본다. 나는 어떤 부모인가. 나는 내 아이와 잘 소통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영화를 보기 전부터 요즘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오고 있던 터였다.
큰 아이에 비해 유독 작은 아이와의 소통이 힘들었다. 이것은 낳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나를 괴롭혀 온 문제였다. 무슨 수를 써도 절대 달래지지 않고 하루 종일 울기만 하는 아이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순간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악을 쓰며 우는 아이를 달래다 못 해 우는 아이를 데리고 일부러 공사장에 갔던 케빈 엄마의 심정을 나는 십분 이해했다. 쉬지 않고 울어대는 아이의 울음 소리는 어느 순간 사람을 살짝 미치게 하기도 한다. 차라리 공사장 소음을 들으며 오히려 편안한 숨을 쉬는 그 마음을 너무나 이해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울기만 하는가. 온 몸으로 최선을 다 해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에게 소리도 지르고, 친정 엄마나 남편에게 맡겨둔 채 며칠을 처다보지 않기도 해 보았다. 아이는 울다울다 온 얼굴에 실핏줄이 다 터져버렸다. 목이 쉬었다. 그렇게 아이는 울고 또 울었었다.
처음에는 화가났고, 나중에는 우울해졌고, 그러다 어느 순간 왜 그렇게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기만 하는건지, 나는 내 아이를 이해하고 싶어졌다. 먼저 각종 정보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아이들을 찾아보고 관련 카페에 가입도 했다. 그 곳에서 다른 엄마들 이야기도 들어보고 다른 아이들의 특징도 비교해 보았다. 국내외 논문들 까지도 찾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한 일은 아이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 엄마가 너를 낳자마자 한 번 안아주지도 못 하고 바로 인큐베이터에 혼자 있게 한거 미안해.
- 그 때 너를 혼자 두고 엄마만 퇴원해서 미안해.
- 모유 먹는거 좋아했는데 마음껏 먹여주지 못 해 미안해.
- 너를 미워해서 미안해.
아기가 알아 듣든 그렇지 않든 나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다독이며 귓 속에 나지막이 그렇게 속삭였다. 진심으로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
물론 내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아이가 하루 아침에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마음가짐의 변화였다. 그 이후로 나는 아이가 무슨 행동을 하든 간에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마음가짐과는 달리 화가 먼저 났고, 소리를 먼저 지르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 수록 나는 더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이제 아이는 말귀도 다 알아듣고, 거의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일에 대해 대화가 통할 만큼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와의 소통은 어렵다. 아이는 여전히 감정적이고, 그 만큼 대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래도 어쨋든 나는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 먼저 단호하게 혼을 내되 감정이 진정되고 나면 꼭 '왜 그랬는지' 물어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를 혼내면서 왜 '그랬냐'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도 나도 서로의 감정이 진정되고 나서 '왜' 그랬는지 당시 아이의 마음을 물어봐 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악에 받쳐 울기를 중단하고 조금은 진정된 톤과 말투로 내게 자신의 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나는 들어준다. 아이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에 공감을 해 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나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맑게 웃는다.
아이는 나를 닮았다. 아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내 노력의 방식은 내 어릴적 어떤 기억과 맞닿아 있다. 나는 꽤 어린 시절, 3~4살 쯤의 일 까지도 몇 가지 기억을 하고 있다. 당시 나는 부산에 살았고, 유아원에 다녔다.
많은 아이들이 교실 바닥에, 몇몇은 그 뒤에 의자를 놓고 한 줄로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선생님이 앞에서 책을 읽어주셨다. 선생님이 한 줄 읽을 때마다 따라 읽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몇 줄 못 가서 그 지시는 중단되었다. 아직은 너무 어린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리가 없었다. 저마다 장난을 치고, 웃고하는 통에 동화책 읽기는 엉망이 되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선생님이 '이제 그만 따라 읽고 가만히 듣기만 하라'고 지시를 변경하셨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선생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책읽기가 방해되는 것이 불편했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의 장난이 조금씩 진정이 되는 듯 했는데 유독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끝까지 장난을 치며 선생님을 따라 했다. 나는 몇 번 그 친구에게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지만 친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참다 못 한 나는 친구의 따귀를 때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내게 따귀를 맞은 친구는 놀라고 아파서 울기 시작했고, 내 행동을 앞에서 지켜본 선생님이 뛰어오셨다.
나는 크게 혼이 났다. 그리고 엄마가 불려오셨다. 수업 시간에 이유없이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한 나쁜 어린이를 모두가 혼내기 시작했다. 나는 무섭고 당황스럽고 억울해서 울고 또 울었다. 선생님들과 엄마가 모두 내게 '왜 그랬는지'를 물었고, 나는 울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왜 그랬는지'는 정말 '왜' 그랬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왜 '그랬는지'를 나무라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 때 한 선생님이 다가 오셨다. 작년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 조용한 데로 데리고 가서는 먼저 우는 나를 달래고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은 민혜가 이유없이 그런 행동을 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생님한테 '왜' 그랬는지 이야기 해 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제서야 설움이 폭발한 나는 한참이나 더 목놓아 운 뒤에 이유를 설명했다. 선생님은 내 마음과 상황을 공감해 주셨고, 그렇지만 친구를 때린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했다. 그 날 일은 내게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나는 지금도 그 날의 기분과 상황과 감정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왜 그랬는지'에 대해 물어봐 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힐난이나 질책이 아니라 관심의 표현이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를 닮아 있는 내 아이를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나의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사건들, 그 때의 감정과 느낌들.
이런 방식이 얼마나, 언제까지 통할는지는 모른다. 머지 않아 사춘기가 찾아올 테고, 어쩌면 물리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았던 아기 때보다 더 소통하기 어려워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 때는 또 어떻게 아이를 이해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수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자, 이제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케빈, 너 왜 그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