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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n 17. 2023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정재찬이 들려주는 시를 읽는 밤


시를 가까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는 늘 어렵고 까다로웠다. 어쩌다 발심하여 사 둔 시집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언제나 방구석 책장에 처박다. 그런 나를 위해 어느 날 친절한 해설을 동반한 시이 선물처럼 내게로 왔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의 서문에서 저자인 정재찬은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 그 관문들에 관한 작은 생각들을 모았다고 하였다. 밥벌이, 돌봄, 건강, 배움, 사랑, 관계, 소유라는 주제로 시를 엮었다. 나는 자리를 깔고 누워서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훑었다.


이런저런 주옥같은 시를 읽으며 인생의 길목을 돌고 돌다. 그게 끝자락에 도달하였다. 누구나 언젠가는 맞이하게 되는 다난 인생길의 다른 골목이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끝이라는 순간, 잠시 죽음이라는 먹먹한 시간 앞에 서성거렸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을 진정으로 되돌아본다. 죽는 순간 자신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그때서야 아차 하며 후회를 하지만 이미 때는 늦는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50년을 살고 보니 49년이 후회더라


정신의학과 교수 양창순의 <명리심리학>에서 소개된 칼릴 지브란의 명언이다. 딱 내 얘기였다. 50이 다 되도록 늘 최고가 되기 위해 자신을 들볶으며 세상과 타인의 옷을 걸친 나는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았다. 한파가 지속되는 겨울에는 손님처럼 찾아오는 가벼운 우울증이 나이만큼 깊어졌다. 나는 나이 50에 비로소 죽음과 함께 남은 생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뇌경색으로 쓰러진 친정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쉰 살은 삶이 전환되는 나이다. 

100세 시대의 인생이 반으로 꺾이는 시점에서 삶을 직시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50이란 나이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한 번쯤 죽음을 생각해 보는 시기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오르막 인생을 마무리하고, 이젠 내리막 인생의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한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죽음 앞에서 후회하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잊지 않을 때, 역설적이게도 삶은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된다.  


내가 바라는 죽음은 '후회가 없는 죽음'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더라도 죽는 순간 후회하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죽을 때 하는 후회들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검색을 하며 생을 앞서 간 선배들의 조언을 듣는 것은 꽤 흥미로웠다. 다양한 버전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첫째, '더 많이 베풀 걸.' 

죽어서는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다는 깨달음이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평소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앞으로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그래서 악착같이 모으고 쌓아 두고도, 자신에게는 물론 주변에도 인색하게 군다. 살아생전 베풀었다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받았을 텐데, 이젠 그런 기회도 없는 것이다. 문득 생전에 재물을 아낌없이 다 쓰고 가는 현명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궁금해졌다.


둘째는 '화내지 말 걸.'

이것은 용서를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하는 사람들의 때늦은 후회일 것이다. 우리는 다들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아집은 주변 사람을 적으로 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옳고 그름은 없다. 언젠가 본 영화가 생각난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은 남편의 외도를 용서할 수 없어서 이혼을 진행하고 있는데, 남편이 비행기 사고로 죽는 이야기였다. 는 그때 죽음 앞에서 용서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셋째는 '좀 더 즐길 걸.' 

주변을 돌아보면 죽는 날까지 일만 죽도록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제주에서 나는 돈보다 자신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를 몇몇 만났다. 다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후예들이다. 일개미들은 그들을 베짱이라고 비난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적은 돈으로도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훨씬 풍다. 나는 그들을 절친으로 삼고 있다. 유유상종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이런저런 후회는 역으로 내겐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 앞에서 나의 인생 선배들이 하고 있는 후회를 하지 않도록 지혜를 배운다. 인생을 앞서 간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스승이고 등불이다. 덕분에 나는 살면서 앞으로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챙기게 되었다. 아낌없이 베풀어야 하고, 넓은 아량으로 화내지 말고 용서하고 살며,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행복을 미룰 것이 아니라 현실에 집중하며 오늘 당장 즐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국 타인의 죽음은 나의 반면교사가 되었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시, <티벳에서>를 소개하련다. 히말라야는 등반을 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이다. 소위 우리가 성공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성공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여기서 히말라야는 인간의 헛된 욕망, 인생의 맹목적인 목표로 비유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길을 걷고 있는 인간들에게 죽음을 통해 삶을 통찰하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삶을 생각하는 것이다



<티벳에서>

                      이성선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스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끝 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 이 글은 인플루엔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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