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친구 두 명을 픽업해서 삼나무가 늘어선 남조로를 달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밤잠을 설쳐 비몽사몽 엉망인 컨디션으로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고, 그들은 왜? 주말의 여유와 늦잠까지 반납한 채 굳이 죽음을 얘기하러이렇게 모여드는 것일까.
죽음카페 오픈 시간은오전 10시였다.1시간이 앞당겨진 까닭에다들 바빴나 보다. 조금 늦는 참석자들이 생겼다. 각자 들고 온 컵에 차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으니 시작이 10여 분 지연되었다. 우리 조는 우연히도 40대의 젊은 여성들로 꾸려졌다. 나는 대화의 규칙을 정하기 전에 먼저 조 이름을 정하자고 하였다. 오늘의 드레스코드인 빨간색을 상징하는 단어로서 체리와 사과, 태양과붉은노을이 나왔다. 그중에 가장 시적인 단어 <붉은노을>이 우리의 조 이름으로 뽑혔다. 이것은 죽음카페가 끝난 후에도 이어진 우리의 멋진 단톡방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
나는 이번에도 고인의 명복을 빌며 대화의 물꼬를 터 나갔다. 고인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자연스레죽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나누어야 할 대화 주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허당 님이 소개한 고인은18년의 인연을 이어나간 반려견이었다. 죽음이 두려워서 반려견과의 만남을 회피했는데,그것이 내내 후회가 남았다고 한다.결국 우리의첫 번째 이야기 주제는 죽음 앞에서만나게 되는후회로 모아졌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
미소가 아름다운 별꽃님은 아직도 삐그덕거리는 신랑과의 관계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샨티님은늘 타인을 배려하느라 감정 표현과 하고 싶은 말을 잘하지 못한 것을, 아직 미혼인 허당님은자신을 몰아가느라 정작 놓쳐버린행복을 꼽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좋아하는 삶의 방식을 차근차근 터득해 나가며 행복해지고 있고, 유서까지적어놓을 정도로 야무졌다.
그렇다면 나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나이 50 즈음에 불현듯 삶의 화두가 된 죽음을 생각하며나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답을 찾기 위해인생 선배들이 죽을 때 하는 후회를 공부하며 교훈을 삼기로 하였다. 많은 이들이 죽음 앞에서~걸~걸~걸 하면서 후회를 하고 있었다. 후회는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인데,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삶의 정답이 보이는 것이다. 안타까웠다.평소에 죽음을 기억했다면 그런 후회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
죽음을 앞두고 하는 후회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었다. 그중내 마음에 새겨진 3대 후회가 있다. 첫 번째후회는 죽으면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는데 평소에 베풀고 나누었더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받았을 걸, 두 번째후회는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화를 냈는데좀더상대방 입장을 헤아리고용서할 걸, 세 번째후회는평생 죽도록 일만 하지 말고 인생을맘껏 즐기다 갈 걸등이다. 이후 나의 삶은 베풀고, 용서하고, 즐기는 것이 기본 방향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숙제로 남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용서이다.
죽음카페의 시간이쏜살같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 다음 주제로 나아갈 차례였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도 용서하지 못할 일은 무엇일까를한 번쯤 되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별꽃님이친정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평생 부도덕하고무책임하며 폭력적이었던 아버지로 인한상처와 증오가 뿌리 깊었다. 아버지를 대신할 사람으로 남편에게 의지했으나 그런 기대가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는또 자녀와의 관계마저어렵게 만들어서 정서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인간의 고통 중에는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원 가족과의 관계는 나약하고 미숙한 어린 시절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스란히 피해자로 남기 쉽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까지 내면 아이의 고통이 현재 삶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것은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 지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뒤돌아보는 것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가족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꼬여서 분노로 뭉친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신념이라는 필터
우리는 방금 전 샨티님이 이야기한 신념이라는 개념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치는 마음의 고통은 집착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데,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며 신봉하고 있는 신념이 함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부모라면마땅히 경제적인능력이 있어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아야 하고,너그러운 마음으로평생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며, 매사에 모범을 보여 자식이 믿고 따르도록 해야 한다, 등등타인에게 적용하고 있는 행동의 기준에는현실과 동떨어진 우리의 이상적인 신념이 깔려 있기도 하다.
우리는 신념이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그 신념이나의 삶을 꼼짝못 하게옭아매는 밧줄이라면 어쩔 것인가.부처님은 이 세상에 옳고 그름이 없다고 가르쳤다. 나는 항상 옳기만 하고 항상 그르기만 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자신에게 닥친 사건과 상황 속에서자신의 신념이 만들어낸 세상 속으로끌려 들어가 서사를 만들어내는 건 바로 자신이다.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고통 속에서 배움이 일어날 때 우리는 성장한다. 그래야온전한 현재를 살 수 있다.우리는 앞으로의삶에서 각자 자신의 신념을 점검해 보기로 약속하였다.
곧이어전체 대화가 시작되었다. 조별로 가장 인상 깊었던 대화를 한 가지씩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더욱 알차게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남편과의 갑작스러운 사별 후 차츰 적응해 가는 이야기, 치매 어머니를 모시며 함께 글과 그림으로 죽음을 준비해 가는 이야기, 죽음까지 생각했던 우울증을 글을 쓰며 회복해 나간 이야기 등이 소개되었다. 삶은 늘 아름답고, 죽음을 준비해 나가는 과정은 감동을 준다.
마지막으로 이번 모임의 드레스코드 베스트 시상식이 있었다.코드는 삶의 열정을 의미하는 빨간색이었다.지난 죽음카페 1차 평가회에서드레스코드가참가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나는 뚝심으로 밀고 나갔다.과하지 않은드레스코드는 모임에서 재미를 더하는 양념 같은 역할을 한다.집을 나서기 전부터 기분을 흥겹게 만들고, 모임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며,참가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서로동질감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날은 우연히 모델 경력이 있는 분이 참석하셨다. 나는 그분께 워킹 지도를 부탁드렸다.즉석 런웨이에서 워킹 시범을 보이자 환호성이 터지며 분위기가 한층 업되었다. 각 조에서 뽑힌 베스트 다섯 명이그분의 뒤를 이어 다소 미숙한워킹을 완수하였다. 박수가 이어졌고, 우리는 박수 소리의 크기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뽑았다. 도서상품권이모바일로 수여되는시상식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죽음카페의 분위기를 깃털처럼 가볍게 멋진 예술로승화시켜 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뒤늦은 점심을 꿀맛처럼 먹고 서귀포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침에 불현듯 피어올랐던 의문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죽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주말의 시간을 쪼개가면서 멀리까지 모여드는 것은, 아마도 죽음을 당당히 직면하고 준비하는 것만이 삶이라는 보석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