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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forter Sep 02. 2022

떠날 수 없는 관계는 없습니다

 퇴고의 퇴고를 거듭한 끝에 종이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는 중입니다>로 소개되었던 내용들을 다시 묶고,

옴니버스 식으로 쓰여졌던 각 꼭지들을 연결해주는 일관된 흐름을 만드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생애 초기 부모와의 관계에서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경험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문제들- 자율성의 부족, 감정조절 및 대인관계의 어려움, 부정적 생각에 침잠되는 현상 등-을 두루 살피고, 상처받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인생을 선택해 나가는 발걸음을 응원하는 책입니다.




< 책 속으로 >

중요한 것은 애착이라는 이 정서적 유대는 양육자가 아이를 독립되고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때에만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애착 관계는 두 사람을 마치 한 몸처럼 살거나 동떨어진 채로 사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마주하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양육자와 아이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라는, 선택 밖의 관계」중에서

대상의 단면만 비추는 거울은 타인을 바라볼 때의 통합적인 시각을 가로막습니다. ‘예쁜 것은 좋은 것, 못생긴 것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이 내재화되어 타인을 획일화된 관점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우열을 가리는데 매진할 뿐, 상대의 다양한 특징을 함께 고려하는 입체적 시각을 키우지 못합니다.
---「지혜롭게 선의를 전하는 법」중에서

많은 부모가 안타깝게도 자신이 낳았으니, 자신이 아이에 관해 다 알고 또 아이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녀가 커 주길 바라고, 나아가서 자녀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관점에서 재단하고서는 그 인생을 강요합니다. 혹은 자신과 자녀가 늘 똑같은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중에서

부모는 부모의 인생을 살고 자녀는 자녀의 인생을 사는 것이지,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지 못합니다. 누군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부모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번 생은 부모님 원하는 대로 해드리려고요.”라고 한다면,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인지 거듭 숙고해보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입니다. 다음은 없습니다.
---「부모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중에서

우리는 대부분 감정을 다루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또한 감정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의 물리적, 정신적인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처리 방법을 모른다고, 시간이 없다고 해서 내버려 둘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안이 아닙니다. 인간이 감정을 느끼도록 설계된 이상, 감정을 배제하는 삶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중에서

중독은 자신을 방치하고 파괴하는 자기 패배적인 행동인 동시에,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대상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일종의 통제 행위이기도 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불행한 결과가 확정됐단 걸 알면서도,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미래’, ‘내 마음대로 망칠 수 있는 나’만큼은 놓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걸고, 망할 수밖에 없는 도박을 지속하는 셈입니다.
---「중독과 몰입의 차이」중에서

세상이 늘 내 편은 아니고 늘 내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지는 않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에서 구원받았다는 감각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또 그 감각을 다른 누군가에게 나눌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중독을 이기는 사소한 감각」중에서

흔히 자기중심적이고 무례한 사람과 자기 몫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만나 짝이 되고, 파괴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경계 혼란의 연장선입니다. 가스라이팅으로 알려진 현상도 바로 이러한 경계 혼란의 단면이고요. 애정으로 엮인 관계는 일반적인 대인관계보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어, 이들의 경계 혼란은 더욱 치명적이고 폭발적인 형태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중에서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양립 불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할 때, 바로 그 지점에서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성장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깨진 그릇에 깃든 사랑의 역사」중에서

생각의 시점이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우울에 빠지기 쉽고, 미래에 가 있으면 불안에 짓눌리기 쉽습니다. 우울과 불안은 인간이 경험하는 주관적 고통의 양대 산맥입니다. 그런 동시에 자신이 바꿀 수 없는 무엇인가에 매달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생각은 바이러스와 같아서」중에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불편을 느끼고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른 채, 사회적 기대에 따라 커온 사람들에게 분노는 생소하고 어려운 감정입니다.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해야만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으며, 분노를 부드럽고 단호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선택지에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인을 분석하고 대처를 모색하는, 문제해결적 사고」중에서



<출판사 리뷰>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를 맺는다

엄마의 배에서 세상에 나오는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더 정확히 말해, 신생아의 뇌는 시각 정보를 처리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어느 누구도 태어난 순간을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 역시 굳이 그 순간을 기억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자신의 탄생을 누구보다 기쁘게 기억해줄 부모가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의지와 온전히 무관하게,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맺고서 세상에 나와 삶을 시작하게 된다.

태어난 이후의 삶도 관계의 연속이자 확장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유아기를 거쳐 자아가 형성될 즈음이면 또래 친구들이 있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에서 '친구'라는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며 생활을 하다가, 사춘기가 되면 미지의 관계와 조우하기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고서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관계를 선택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세우기도 하는 것이, 우리 대개의 인생에 가까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결국 관계의 연속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인 부모와의 관계, 스스로에게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나 자신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내가 직접 선택하고 유지하는 친구 연인과의 관계들을 보자면, 삶과 삶을 연결해주는 고리의 이름이 관계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무수한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관계란 이토록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라, 때때로 우리를 무엇보다 고통스레 만들기도 한다. 부모라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오래된 인연이라는 이유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를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에 상대를 단호하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다양한 이유를 축약하자면 결국 ‘건강한 내적 표상’이 없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건강한 내적 표상이란 입체성과 통합성을 바탕으로, 대상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도록 하는 심리적 보호 장치이다. 이 장치는 상대가 나의 기대에 어긋나더라도 과도한 환상이나 상종 못 할 악마의 탈을 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인간의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구분되지 않는다. 어떤 인간에게든 밝은 모습과 어두운 모습이 함께 존재하며, 어느 한쪽만 바라보며 ‘저 사람은 그래도 나를 생각해’라고 합리화하거나, ‘두 번 다시 꼴보기 싫다’는 탈을 덧씌우면 어느 쪽으로든 편향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있는 그대로 상대’로, 즉 입체적이면서 통합적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만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소용없고 괴로움을 참기만 해야 할 것 같다면, 그러한 관계는 놓아주는 것이 서로에게 이롭다. 우정이나 사랑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그것들이 ‘나’를 해치는 지경에 이르게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나와 얽힌 관계들이지만
내가 모두 책임질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여기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품고 상대가 바뀌도록 내가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요? 정말 그것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거든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들 땐, ‘이것’만 뺀 그 사람은 애당초에 존재할 수가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보다도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는 모두 결코 타인 인생의 정원사가 되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정원도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가족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상대의 어딘지가 못마땅할 때면,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상대의 정원을 손질해도 되는 권리를 양도받은 것처럼 대할 때가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누구도 내 뜻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다음 단계에서 던질 질문은 보다 명확해진다. ‘상대가 변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그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말이다. 관계를 끝내든 지속하든,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나아가는 길에는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없다. 나를 둘러싼 왜곡된 관계를 내가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할 수 있다. 관계의 변화를 성장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 퇴행의 역사로 기록할 것인지 말이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라는 농담 같은 말도 있지만, 전혀 말도 되지 않는 농담만은 아니다. ‘설혹 혼자가 될지라도 지켜야만 하는’ 자기 자신이 있으므로. 그러니 세상 그 누구보다 소중한 당신과 당신의 관계를 위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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