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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호 Mar 03. 2024

알프스 속 작은 와인 마을, 트라민을 맛보다

알토 아디제 주 최고의 와이너리 '칸티나 트라민'에서 마시는 웰컴 드링크

목숨 걱정까지 했던 이탈리아 가는 길

인천에서 바르샤바를 거쳐 밀라노까지 무려 20시간을 날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며 4년만에 떠난 유럽 여행길은 바람과는 달리 험난하게 시작했다.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를 질주하던 비행기는 별안간 급제동했다. 몸이 앞으로 조금 쏠릴 정도로 속력이 급격히 죽었다. 허리를 감싼 안전벨트가 내 몸이 앞으로 튕겨나가지 않게 꽉 잡아주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반쯤 어리둥절해 있다 문득 섬뜩한 결말 수십 가지가 머리속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가운데 통로석에 앉아 있어 바깥을 전혀 볼 수 없었던 터라 더욱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항공사고수사대에서 봤던 것 같은데. 활주로에 문제가 생긴 걸까? 다른 비행기와 충돌하는 걸까? 인생이 이리 허망하게 끝나는 걸까?


비행기가 속도를 완전히 줄이기까지 몇 초 동안 그저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비행기는 무사히 멈췄고, 게이트로 회항했다. 곧이어 안내방송이 나왔다. 조종실 시스템에 어떤 이상이 생겨 정비하고 간다는 말이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던 정비는 점점 길어져 2시간 넘게 흘러서야 끝났다. 경유지인 바르샤바에서 밀라노로 가는 환승 비행기도 스케줄상 놓쳤어야 했지만, 그 비행편마저 미뤄져 바르샤바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밀라노 공항에 도착했을 땐 예정 도착 시간보다 불과 1시간 정도 늦은 시간이었다. 자정이 넘어 숙소에 도착하자 무사히 넘어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탁 풀리며 피로가 몰려왔다.

밀라노 말펜사 공항 주변 풍경과 idea 호텔


짧은 잠에서 깨어 또다시 긴 여정에 나선다.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서 돌로미티 서쪽 관문인 볼차노까지 3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말펜사 공항에서 밀라노 중앙역, 밀라노 중앙역에서 베로나, 베로나에서 볼차노까지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며 돌로미티로 향한다. 환승을 거듭하며 나아갈수록 풍경도 달라진다. 점점 늘어나는 초록빛에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다. 볼차노에 가까워지니 푸르른 포도밭이 펼쳐진다. 달리고 달려도 그 끝이 쉬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다. 이 포도밭이 돌로미티 여행 첫 번째 목적지이다. 볼차노에 도착해서 여정을 함께 하기로 한 작가님을 만나 호스텔에 짐을 내려놓은 후 너른 포도밭이 펼쳐지는 와인 마을인 트라민으로 향한다.


트라민과 와이너리

트라민은 볼차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레지오날 기차를 타고 Egna-Termeno(Neumarkt-Tramin)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마을 중심으로 향한다. 와이너리에서 와인 시음을 하며 여행 기분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도를 보며 여기서 내리는 게 맞는지 우물쭈물하는 사이 버스는 우리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갔다. 황급히 정차 버튼을 누르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을을 벗어난 버스는 멈출 줄을 모르고 2차선 도로를 힘차게 달렸다. 도대체 다음 정류장이 어디야? 하는 당황도 잠시, 사방으로 펼쳐진 초록빛 포도밭이 마음을 달래준다. 버스는 그 길로 약 3km를 달리고 나서야 한 캠핑장 앞 정류장에 멈춰섰다. 원래 내렸어야 했을 정류장에 그대로 내렸다면 마주하지 못했을 싱그러운 풍경이 가득했다. 길 반대편에서 되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풍경에 잠시 빠진다. 구름이 몇 점 동동 떠있는 파란 하늘 아래 초록빛 산과 작은 호수, 너른 포도밭이 만들어 내는 경치를 보니 벌써 와인 한 잔을 마신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잘못 내린 곳에서 마주한 풍경

길을 한 번 헤매고 나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훌쩍 가까워졌다. 와이너리를 가기 전에 점심을 먼저 먹기로 했다. 트라민 중심가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식전주와 바우언토스트를 주문했다. 바우언은 농부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농부 토스트’이다. 알토 아디제(쥐트티롤) 전통 음식이라고 한다. 납작한 호밀빵 안에 베이컨과 치즈 등을 넣어 노릇노릇하게 구운 요리이다. 들어간 재료가 간단하고 먹기도 편해 간단한 식사나 간식으로 제격이다. 

트라민 거리 풍경
바우렌토스트

점심까지 다 먹고 나서야 트라민에 온 가장 큰 목적을 달성했다. 우리가 찾아간 Cantina Tramin은 1893년에 세워진 와인 조합 Cantina Sociale di Egna과 합병되어 탄생한 곳이고, 알토 아디제 주에서 가장 인정받는 와이너리 조합이다. 270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포도밭을 소유하며 연간 와인 190만 병을 생산하는 거대한 와이너리이다. 와이너리 건물은 초록색 기둥이 넝쿨처럼 엮여있는 디자인이 마치 포도밭을 건축물로 승화한 듯하다. 

칸티나 트라민 와이너리


와이너리에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 다양한 와인이 진열되어 있다. 카운터에서 와인 목록과 가격이 적힌 표를 받는다. 와인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 철자와 가격에 차이가 있다는 것만 보인다. 가격을 보고 가장 저렴한 샤르도네(Chardonnay)로 골랐다. 와인 진열장에서 샤르도네를 소개한 안내 글을 읽어본다. 샤르도네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인기 품종이며, 녹황색을 띤다고 한다. 은은한 과일 향을 풍기며 끝맛이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와인 '샤르도네'


와인잔을 받아 테라스에 나가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무 의자에 앉아 포도밭 풍경을 안주 삼아 담소를 나누며 와인을 마시고 있다. 나도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그 맛은 잘 몰라도, 광활한 포도밭을 눈앞에 두고 신선한 와인을 마시니 이곳이 곧 지상 낙원이다. 아직 몸이 시차에 덜 적응한 만큼 피로가 쌓여 있어,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수록 취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취기가 올라갈수록 마치 비행기를 다시 탄 듯 몸이 조금씩 뜨는 기분이다. 호텔에 체크인하면 웰컴 드링크를 받는 것처럼, 돌로미티에 첫 발을 내딛은 작은 선물을 받은 것만 같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은 앞으로 여행이 잘 흘러갈 것이라고 예고하는 것만 같다. 몸이 노곤해지며 자꾸만 하품이 나온다. 짧은 트라민 여행을 마치고 더욱 깊은 돌로미티 속으로 들어갈 날들을 고대한다.

칸티나 트라민의 야외 테라스
야외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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