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채가 우람한 북한산을 지나 강을 따라 나있는 도로를 따라가니, 짜장면, 송어회, 기사식당부터 모텔까지 전형적인 유원지 거리가 나타났다. 계곡에 발담그러 온 관광객들을 품을 것 같은 이곳에 놀이동산이 있다고? 좁디좁은 왕복 2차로의 지도를 살펴보고 있자니 벌써 다 왔단다.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공장인지 창고인지 모를 거대한 회색 건물이 떡하니 서있다. '두리랜드 영업 중'.
20대 초 졸업한 놀이동산을 다시 찾게 된 건, 아이의 부모가 된 덕분이다. 청소년 때는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2시간이나 줄을 서면서도 깔깔거렸고, 대학생 때는 친구들과 유치한 머리띠 하나씩 차고 셀카를 찍어댔다. 양육자가 된 지금은, 기구를 타는 아이에게 손 흔들어주는게 주요 할일이다.
양육자로 다시 찾은 놀이동산은 새로웠다. 그동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온갖 짐을 거느리고는 벤치에 앉아 유아차 핸들에 기대어 조는 사람, 일행이 기구를 타러 간 동안 아이 대신 또다른 놀이기구의 줄 서고 있는 사람, 아이가 흘린 음료수를 닦느라 가방에서 황급히 물티슈를 꺼내는 사람, 퍼레이드를 위해 일찍이 자리를 잡으려고 돗자리를 가져온 사람... 양육자가 되니 놀이동산의 양육자만 보였다.
모든 양육자들은 바쁘고 동시에 피곤해 보였다. 신나는 아이를 향해 사진을 찍다가도 종종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고, 일행 대신 줄을 서는 긴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끄적대다가도 스트레칭을 하곤 했다. 키가 작은 아이가 퍼레이드를 잘 관람하지 못할까 봐,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몇 십 분 동안 아이를 안고 서있던 어떤 아빠의 온 등짝이 땀으로 젖어 있는 걸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아빠의 뒷모습에 대고 힘내세요 중얼거리기도 했다. 우리도 작년 한 해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여름에는 장마와 무더위, 겨울에는 기상한파를 피해 서울에서 가장 큰 놀이동산의 연간회원권을 끊었고, 뽕빼느라고 줄기차게 다닌 결과 지금은 놀이동산에 대한 권태가 찾아온 상태였다.
놀이동산에서 지쳐버린 사람들
"그 큰 놀이동산도 질려버렸는데, 웬일이래?"
"가보면 알아. 두리랜드는 다르다니까."
이미 아이를 데리고 가본 남편이 두리랜드를 향해 보내는 신뢰는 단단했다. 아무리 블로그를 검색해 봐도, 다른 키즈카페나 놀이동산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남편이 그곳을 극찬하고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실내 놀이동산은 매우 깔끔했다. 5층짜리 건물의 각 층고가 높아 실내임에도 쾌적한 느낌이 들었다. 기존 놀이동산과 다를 게 없을 것이라는 나도 들어간 지 10분도 안 되어 두리랜드를 극찬하게 되었다.
양육자로써 느끼는 두리랜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첫째,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4층과 5층에는 가족들이 모두 둘러앉을 수 있는 정자가 각 십여채는 있었는데, 신발 벗고 올라가서 쉴 수 있었고 바닥도 먼지 하나 없었다. 정자의 중간에는 작은 탁자도 있어 집에서 싸 온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그 정자가 뭐라고 이렇게 감동하냐고 느낄 수 있지만, 그동안 다녀본 키즈카페나 놀이동산에서는 '앉는 자리'가 바로 돈이었다. 좀 앉아서 쉬려면 돈 내고 먹거나 마셔야 했고, 그 외에 앉을자리는 턱없이 부족하거나 불편했다. 적은 벤치의 수 때문에, 앉아있는 사람과 앉고 싶은 사람 간의 눈치싸움도 치열했다. 야외에서 무상으로 제공되는 자리는 의자만 턱 하니 있었고, 탁자나 그늘이 있는 자리는 모두 돈 내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돈 없는 자는 앉을 수 없었고, 앉더라도 탁자가 없었으며, 그늘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런데 탁자와 그늘이 동시에 제공되는 앉을자리가 두리랜드에서는 너무나도 많았다. 입장료를 내고 입장한 다음부터는 앉을자리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둘째, 음식 반입이 가능했다. 실외음식반입이 불가능한 다른 놀이동산에서는 먹는 것도 경쟁이었다. 방학시즌이 겹치던 어느 날 남편은 추로스를 먹기 위해 30분 동안 줄 서는 광경도 목격했다고 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추로스뿐인가, 시중보다 배로 비싼 돈가스정식과 라면의 값도 놀이동산은 그렇지 뭐 하고 감수해야 하고, 놀이동산 내 음식점 자리 경쟁 때문에 여유롭게 먹을 시간마저 없다. 배식을 받은 트레이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다 먹어가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어, 먹고 나면 바로 자리를 떠야 한다. 그런데 두리랜드는 대놓고 음식을 싸와도 된다니... 집에서 싸 온 사과도, 볶음밥도 두리랜드에서는 당당하게 꺼내서 천천히 음미하며 먹을 수 있다.
셋째, 재입장이 가능했다. 두리랜드의 입구에서 손에 빨간 두리랜드 도장을 찍고 나면, 중간에 차 끌고 인근 음식점에 다녀와도 무방한 것이다. 재입장은 절대 안 되던 다른 놀이동산에서는 입장객들이 철저히 통제받는다. 나갔다가 다시 재입장할 일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안 되는 것과 되는데 안 하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넷째, 무동력으로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들을 우선 배치했다. 5층으로 이루어진 두리랜드는 1층을 제외하고는, 2층부터 5층까지는 무동력으로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대부분이다. 5층에는 미로 찾기, 4층에는 넓은 야외공간에 배드민턴부터 전통놀이까지 가족들과 어울려서 놀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깔려있다. 3층에는 암벽등반과 초대형 트램펄린이, 2층에는 썰매와 볼풀장 등이 있어 모두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놀이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1층의 동력 놀이기구들은 별도의 돈을 내고 타야 하는데, 사실상 2층부터 5층까지의 놀이기구들만 놀아도 하루가 다 간다. 그동안 대형 놀이동산에서의 놀이기구들은 어땠는가. 20분 줄 서서 고작 1분 타는 기차에서 어린이는 그저 수동적으로 자신의 몸을 맞기는 일 밖에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롭다. 하지만 무동력의 놀이기구들은 자신의 힘과 동작에 따라 다양한 놀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질리기가 힘들다.
다섯째, 전반적으로 양육자를 신용카드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는 인상을 받았다. 양육자들은 놀이동산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잃고 표류하는가. 아이의 사진을 찍고, 아이를 위해 줄 서고, 기구를 타는 아이를 기다리다 보면 하루가 다 가니 놀이동산에서 놀고 나오는 양육자들은 피로가 가득하다. 두리랜드는 중간중간에 안마의자를 무상제공하고 있었는데, 안마의자가 꽤나 많아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복수의 양육자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교대로 안마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중간에 '발마사지체험장'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발마사지를 해주는 동력기구가 있는 게 아니라, 허공의 공간에서 밧줄을 밟을 수 있게 해 주어 밧줄을 통해 지압이 되도록 해놓았다. 그 외에도 저렴한 돈으로 1시간 잘 수 있는 산소방까지 있었다. 그동안 여타 놀이동산에서는 양육자가 자신을 돌볼 기회를 얻을 수 없었는데, 이러한 사소한 배려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가장 놀라웠던건 두리랜드의 영업시간이었다. 두리랜드의 영업시간은 10시 30분부터 18시이다. 즉, 두리랜드는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직원들도 퇴근 후 저녁을 가족과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수익을 바라보며 밤 10시까지 영업하는 다른 놀이동산과 달리, 해와 달을 볼 수 있는 출퇴근 주기를 가진 두리랜드 직원들은 모두 누적된 피로가 없어 보인다. 빨간 두리랜드 조끼를 입은 직원들은 훈련된 서비스 멘트와 웃음은 없었지만, 어떤 사명감마저도 느껴질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아이들이 문제없이 놀고 있는지 확인 또 확인했다.
두리랜드를 마음껏 즐기고 나니 어느덧 6시 무렵이 되었다. 두리랜드를 걸어 나오는 가족들 모두 하품 하나 하지 않고 즐겁게 걸어 나왔다. 창립자의 목표에 따라 놀이동산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설립자인 배우 임채무는 사극을 촬영하던 어느 날, 유원지에서 방치된 아이들이 유리병에 발을 다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놀이동산을 꿈꿨다고 한다. IMF와 자연재해를 거치면서 은행에 거대한 빚도 지고 여러 번 휴장도 하였지만, 아이들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온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재무적으로 큰 이익을 벌은 적도 없고 도리어 재단장하면서 어마어마한 채무를 지게 되었지만 단 한 번도 직원들의 월급을 밀린 적이 없다고 한다. 그동안 키즈카페와 놀이동산에서 표류하던 양육자의 피로를 두리랜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돈만이 목적이었던 여타 놀이동산에서 해왔던 긴장을 두리랜드에서는 전혀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사랑으로 지어진 놀이동산은 달라도 참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