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 간 여행유튜버가 포케보울을 비벼 한입 먹더니 말했다. 유튜버가 포케를 비빔밥이라고 해석한 순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구나 안심했다. 5년 전부터 한국에 상륙해서 전국으로 퍼진 포케집을 볼 때마다, 나는 입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곤 했다. 아무리 봐도 밥과 채소의 조합이 영락없는 비빔밥인데 전국으로 퍼진 이유가 무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유튜브 TEO의 하와이편 캡처
분식집에서 파는 일반비빔밥은 육 천 원, 일반 식당에서 파는 돌솥비빔밥 가격은 만 원인데, 포케는 토핑에 따라 만원에서 만오천 원까지 가격이 형성되어 있다. 사람들이 비빔밥이 아닌 돌솥비빔밥을 선택할 때는, 솥의 따뜻함을 바라며 4000원을 더 내는 건데, 아무 온기도 없는 그릇에 담겨있는 포케라는 게 돌솥비빔밥보다 더 비쌌다. 사람들은 포케가 비싸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우리 동네에 막 생긴 포케집은 오픈 이래 줄곧 문전성시다. 정체만 궁금해할 뿐 사 먹지 않았던 나도 지인과 외부 약속이 생겨서 드디어 포케를 사 먹을 기회가 생겼다.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마친 후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채식인인 후배의 연어포케와 채식인인 내가 선택한 두부포케가 각각 담겨 나왔다. 단단한 질감의 나무 숟가락과 젓가락도 함께 나왔다. 구성을 들여다보니 가장 하단에 치커리가 담겨있고, 그 위로 썰은 올리브와 방울토마토, 현미밥과 삶은 콩, 두부, 콘옥수수, 튀긴 양파 등이 얹어져있다. 위에 살짝 뿌려진 소스는 새콤달콤한 간장맛이다. 유튜버말이 맞았다. 정말 영락없이 고추장 없는 비빔밥이네!!
슬로우캘리 캡처
포케는 하와이말로 '자르다'는 표현으로 본래 다랑어나 참치를 날것으로 썰어 양념한 음식이다. 백종원의 음식다큐 스트리트푸드파이터에서 등장한 포케는 익히지 않은 참치를 정방형으로 썰어 간장소스로 가볍게 버무린 것만 나온다. 여기에 각종 채소와 밥, 국수 등이 추가되면 포케보울(poke bowl)이 되는 것이다. 포케가 양념된 생선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포케보울은 그야말로 간장양념의 회덮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포케만 팔지 않고 포케보울로만 팔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포케란 포케보울을 지칭하게 되었다. 비건옵션이 붙으면서 깍둑썬 생선회는 두부나 버섯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백종원의 스트리트푸드파이터 하와이편에 나온 포케. 포케보울이 아닌 이상 생선회를 버무린 것만 나온다.
내가 간 포케집에는 대부분 20~30대 여자들이 많았다. 평소 비빔밥을 선호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 그들은 왜 포케보울을 좋아하는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니 포케보울과 비빔밥은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채소를 다루는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비빔밥의 경우 고사리, 콩나물, 시금치, 당근, 버섯, 애호박 등이 이미 각각 손질되어 양념과 함께 나물화되어 있는 반면, 포케보울의 경우 채소를 생으로 쓴다. 비빔밥을 실제로 만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비빔밥의 각 채소를 손질하는 건 어마어마한 노동이 필요하다. 뜨거운 물에 데치고, 식히고, 썰고, 소금과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과 다진 마늘에 버무린다. 각 나물은 비빔밥의 구성요소가 되기 전, 독립적으로 먹을 수 있는 요리인 것이다. 반면, 포케보울에 얹어져 있는 체소들은 생채소이거나 경우에 따라 살짝 굽기만 한다. 채소의 가공이 많지 않기 때문에, 포케의 연관검색어에는 '포케와 샐러드의 차이'가 항상 뜰정도다.
소스의 경우 포케는 달짝지근한 간장이 양념이다. 경우에 따라 고추냉이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고추장이 기본양념인 비빔밥에 비해 맛이 덜 자극적인 편이고, 비벼도채소의 색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좀 더 가벼운 느낌이 든다. 담백한 소스맛에 감칠맛을 내고자 일본식 조미볶음이 토핑으로 추가된다.
간장과 고추장
비건인 내가 느꼈을 때, 한국에 안착된 포케보울과 비빔밥의 가장 큰 차이는 재료도 소스도 아닌, 현미밥의 유무였다. 채식을 통해 영양소가 결핍되지 않으려면 통곡물을 먹어야 하는데, 외식할 때 비건옵션이 있는 곳에서도 의외로 현미밥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현미밥은 백미밥에 비해 꺼끌꺼끌하고 다작을 요하기 때문에, 다수의 손님을 겨냥한 식당에서는 현미밥을 제공하는 리스크를 감수하기 힘들다. 채식음식점에 가보아도 백미밥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백미밥에 익숙한 사람들은 현미밥이 소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건강을 중시하거나 다이어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미밥을 먼저 찾는 경우가 드물다. 현미밥의 그 어려운 이미지를, 포케보울은 가뿐하게 넘겨버렸다. 애초에 포케보울이 '샐러드, 건강' 카테고리에 안착하면서, 현미밥과 메밀면만 옵션에 있어도, 고객들이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낮은 칼로리와 가벼운 소스의 맛 때문에 포케는 현재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지만, 생채소를 먹는 것은 기본적으로 몸을 차게 한다. 일 년 내내 따뜻한 하와이에서는 포케보울은 열을 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 추운 겨울 포케의 선호도는 조금 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사람들하고는 포케를 먹기가 힘들어요. 단 10분 안에 밥을 드시는 분도 많고, 포케에 채소가 많아 선호하는 분도 많지 않고요."
포케를 먹고 나오는 길, 후배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포케집에 방문한 손님들은 대부분 혼자 오거나, 비슷한 연령대의 동료와 둘이 온 경우가 많았다. 후배도 천천히 먹는 편이고, 나도 천천히 먹는 편이라 포케를 먹는데 30분을 쓸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생채소와 현미밥 때문인지 부드러운 포만감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손이 많이 가는 비빔밥이 포케보다 훨씬 가성비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비건옵션을 제공하는 포케집의 대유행으로 아마 전국의 비건들은 나처럼 웃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