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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Jun 07. 2021

2021년 3월 어느 날의 일기

일기는 쓰지만 말고 시간이 지난 후 읽기도 하자

이 무렵에 집에 가족과 함께 있었던 적이 근 10년간 두 번 뿐이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흘렀다. 내 인생에도 '10년'이라는 단위로 묶어 부를 만한 경험의 뭉텅이가 생겼다. 그 경험들은 때로는 고통스러웠으며 가끔은 행복했고 대체로 평탄했다. 엄청난 실패나 상실을 겪지는 않았고 자잘한 실패와 자잘한 성공을 겪으며 나는 어느덧 20대 중반이라는 인생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국 나이로는 스물여섯. 내 삶도 태도도 정신도 걸음걸이도 자세도 건강도 모두 변해감을 느낀다.

가장 큰 변화는 덜 쭈뼛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직원에게 뭔가를 물어볼 때도,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 갑자기 휙 돌아가야 할 때도, 나는 이제 조금만 망설인다. 나의 요구 사항을 좀 더 당당히 말하고 사회생활, 이라는 것에 나의 오른발 정도를 들여놓았다. 적극적으로 일을 구하되 조급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좀 더 긴 단위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당장 보이지 않는 것들을 헤아린다. 나는 시대의 흐름 속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시대와 함께 흐를 것인가. 함께 흐른다면 그저 표류하지 않기 위해 내가 나에게 부여할 나만의 사명은 무엇인가.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일.


미란다 프리슬리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Truth is, there is no one that can do what I do."

사실, 내가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언젠가 나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요즘 건축가 승효상의 책을 탐독하고 있다.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상당한 연구 영감을 받고 있고,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연구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정체 모를 확신이 강하게 든다. 향후 10년간, 어쩌면 일평생을 이 연구에 매진하게 될 것도 같다. 나는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내진 않았다. 90년대생인 나는 그것을 꿰뚫는 진리를, 그 진리의 아주 작은 파편이라도 끊임없이 탐구하여 밝혀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겠다.


어제는 씨네큐브에서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봤다. 왕가위는 독보적이다. 색감과 구도 모두 더할 나위 없었다. 작업물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엄청난 축복이다.


정세랑의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의 한 단락이다.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라는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처절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p. 39)


나는 누구의 세계 속을 유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도, 나도, 아주 작은 흐름이라도, 아주 작은 파문이라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벤다이어그램들의 중심일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계들을 끌어모아야 하는 걸까. 마치 '왕가위'라는 이름 석 자가 어떠한 수식어 없이도 고유하게 상징하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내 이름 석 자도 그런 고유한 의미를 갖출 수 있을까.


슈가가 그랬다.

"저희도 어릴 적에 영웅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고 방탄소년단이 됐다. 제 2의 방탄소년단이 나오는 것보다는 또 다른, 더 멋진 가수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게 멋진 그림일 것 같다."


내가 나의 롤모델이 되지 못한다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될까?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3월이다.

따뜻해지는 날씨에 외출이 즐겁고 발걸음이 가볍다.

별 부담 없이 카페에 앉아 노트북 자판이나 두들기며 커피를 홀짝대는 오후들이 퍽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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