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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Sep 18. 2021

케이팝의 국적

덕질 10년차 고인물의 방구석 케이팝 사회학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전세계에 울려퍼지던 시절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나에게 외국인 친구들은 종종 케이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건 맞는데 과연 그들이 케이팝의 전부일까? 이 친구들이 나에게 물어보는 케이팝은 뭘까 문득 궁금해졌다.

원래도 케이팝과 아이돌 산업을 관심 있게 지켜보긴 했지만 최근에 흥미로운 트렌드들이 많이 보여서 <케이팝의 국적>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학창시절 아이돌 판은 가히 춘추전국시대에 비견될 만했다.

쟁쟁한 2세대 걸그룹, 보이그룹들의 치열한 접전속에 내 미키 마우스 MP3의 귀는 디스코 팡팡 마냥 계속 돌아갔다. (놀랍게도 검색해보니 아이리버의 미키 마우스 MP3는 아직도 판매되고 있다. 이제는 표정도 짓는 스마트한 첨단 미키 마우스로 진화했다는 소식이다.)

아무튼 그 시절 좋아하는 최신 가요를 싸이월드 bgm으로 설정하려고 부모님께 도토리를 사달라고 조르던 초등학생이 이제 소위 “3.5세대” 또는 “4세대” 아이돌의 데뷔를 보며 그들의 출생연도에 놀라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근 몇 년간 케이팝 씬에서 한국적인 요소를 음악과 퍼포먼스에 녹여 내려는 시도들이 자주 보였다. 꽹과리, 징 소리가 들어간 B.A.P.의 곡 <No Mercy>, 동양적인 컨셉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내세웠던 빅스의 <도원경>, 퀸덤에서 한국적인 편곡과 무대 구성으로 화제가 되었던 오마이걸의 <데스티니> 커버, 한국 고유의 “한”이라는 정서를 가사와 안무로 풀어낸 (여자)아이들의 <한(一)>, 방탄소년단의 <아이돌>, 그리고 Agust D (방탄소년단 슈가)의 <대취타>까지.


그런가 하면 트로피컬 하우스, 트랩, 뭄바톤, 이모 힙합 등과 같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장르와 궤를 같이 하는 음악도 다수 있었다. 위너의 <Really Really>, 태연의 <Starlight>, 청하의 <Why Don’t You Love Me> 등 청량한 느낌을 주는 트로피컬 하우스풍의 곡, 그리고 뭄바톤 장르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방탄소년단의 <피, 땀, 눈물>이나 블랙핑크의 <불장난> 등 국내외 막론하고 큰 인기를 끌었던 곡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렇듯 세계적인 음악 트렌드의 반영, 그리고 외국 작곡가나 안무팀과의 협업은 2010년대 이후 눈에 띄게 늘었으며,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해외 가수와 협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해외에서의 인기를 기반으로 해외 팬들을 겨냥한 음악을 내놓는 그룹들도 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는 DSP 미디어의 혼성 그룹 K.A.R.D.(카드)다. 카드의 경우 해외에서의 인기, 특히 남아메리카에서의 인기를 인식했는지 스페인어 수록곡이나 <Red Moon>과 같은 라틴풍의 레게톤 곡을 내놓기도 했다. 작년에 공개된 청하의 <Stay Tonight>은 1970년대 할렘의 게이, 트렌스젠더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보깅 안무를 반영해 케이팝 씬 내에 존재하는 안무 장르의 다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라는 방송의 존재와 댄스 스튜디오 원밀리언의 유튜브 구독자 수를 보면 K-댄서 및 안무가 (요즘은 뭐든지 앞에 K-를 붙이는 게 유행인듯 하다..) 에 대한 인식과 존중도 점차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한류와 케이팝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이 새로운 사회문화적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고자 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나 또한 사회학도로서 가끔은 팬이 아닌 연구자눈으로 케이팝을 바라보게 된다.


대학교 때 들었던 수업 중 한국 음악의 역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조명하는 수업이 있었다. 나는 기말 페이퍼 주제로 저명한 탈식민 이론가 호미 바바의 문화 혼종성 (cultural hybridity) 개념을 통해 본 방탄소년단의 정체성을 골랐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중 아이돌 콘서트에 갔는데 외국인 관객들이 응원법과 한국어 가사를 완벽히 숙지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떼창하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던 기억도 있다.


케이팝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는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등등 방탄소년단을 필두로 한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마치 올림픽에 출전한 국가 대표 선수들처럼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댓글이 많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에는 외국인 멤버들도 포함되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까지는 한국인 멤버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케이팝 특유의 트레이닝 모델과 산업 구조는 물론 한국의 유교적 직업 의식을 비롯해 겸손함과 노력, 올바른 언행을 중시하는 풍조 등은 한국 고유의 것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제 케이팝이 하나의 거대한 세계적 사회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은 만큼, 케이팝의 특정 요소가 아닌 케이팝 그 자체를 ‘한국 고유의 것’이라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있는 사고와 논의가 필요해졌다. 또한 케이팝 내에 존재하는 인종 차별, 왜곡된 미의 기준, 아이돌 멤버들의 인권 침해 및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들의 노동권 침해, 미성년자 아이돌 멤버의 성적 대상화 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케이팝은 화려한만큼 그림자도 짙은 산업이다.


내가 지금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K-pop의 “K”는 결국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순간순간 재정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케이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나게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이 확장의 최전선에 서 있는 아티스트들과 기획사들은 기존 케이팝 또는 음악 산업의 영역을 부수고 뛰어넘는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내놓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라는 변수가 케이팝에 장기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두고 볼 일이다. 메타버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버추얼(가상) 아이돌을 보며, 미래에는 멤버의 사회적 평판이나 물의, 범죄 (속된 말로 '병크')를 걱정하지 않고 덕질할 수 있는 AI돌이 정말로 활발히 활동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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