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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팽나무 Sep 01. 2021

계단

 9층 아파트 계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얼룩덜룩한 건너편 아파트 담벼락이 창틀 속으로 들어온다. 9층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높이를 가늠할 수 없다. 앞에는 오직 네모난 창들만 있을 뿐 시선은 한정적이다. 같은 모양의 아파트가 가로막아버린 저 뒤의 세상은 어떤 색깔일까. 베란다처럼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으니 수평의 시선만이 허용된다.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과 창틀이 마치 종이에 그려놓은 도면처럼 황량하다. 만약 앞에 다른 풍경이 있다면 창문은 고즈넉한 그림 한 장을 스케치했을지도 모른다. 높은 산이나 푸른 들판, 넓은 바다가 있다면 창틀에 한정된 풍경이라도 꽤 운치 있었으리. 아래층이라면 나무의 그림자나 우듬지의 신비한 초록을 담을 수도 있었으련만 9층의 높이는 자연보다 인공의 색에 가깝다.

  늘 베란다에서 밖을 바라봤을 뿐 계단에 앉아 시선을 두는 건 처음이다. 탁 트인 베란다는 사방의 경치를 볼 수 있어 답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계단은 한정적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계단에 앉아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래층과 꼭대기까지 막히지 않고 쭉 이어진 계단이야말로 열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엘리베이터는 모든 층을 분리한다. 딱딱 끊어진 절제되고 빈틈없는 공간만을 허용한다. 뒤로 물러설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정체된 영역이다. 각각의 층만이 있을 뿐 이어짐은 없다. 현대의 엘리베이터는 그래서 황량하다. 교차로처럼 사람이 수없이 드나드는 공간이지만 소통보다 불통이 존재한다. 몸과 몸이 닿는 친밀한 공간이면서도 사람들은 거리를 느낀다.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한 게 엘리베이터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엘리베이터는 더욱 황량한 곳이 되었다. 인사조차 나누지 않던 사람들은 이제 상대방을 대놓고 외면한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서로를 경계하지만, 서로의 체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선의 방황과 행동의 부자연스러움 속에서 홀로 고독하다. 그러면서도 매일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아파트에는 계단이 있지만, 계단을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고층에 살수록 계단하고는 점점 멀어진다.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살다 보면 엘리베이터와 친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조차 지루하게 느껴지니 계단은 비상구가 되어버렸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도 계단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계단이 눈에 들어온 건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불어온 산뜻한 바람 때문이었다. 계단에 창문이 있고 층마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전염병으로 인한 막연한 두려움도 계단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 뒤로 가끔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게 되었다. 계단은 사람들에게 잊힌 공간처럼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발자국만이 찍혀 있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 보니 내 안의 계단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오 층짜리 상가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아무리 무거운 물건이라도 계단을 통해 올려야 했다.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계단을 부여잡고 힘을 얻는 게 전부였다. 곧바로 수직 상승 할 수 없던 그곳에서 계단은 굉장히 중요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물 청소를 하다 보니 이웃과의 소통도 자연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계단에서는 서로 비껴가도 인사가 가능했는데 엘리베이터는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외면하기 일쑤다. 시대가 변한 건지 사람 마음이 변한 건지 알 수 없지만, 계단은 한때 그런 곳이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계단에 앉아 지나온 삶의 계단을 생각한다.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산골 마을,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청춘을 묻어야 했던 항구도시, 결혼과 이별 그리고 혼란스러웠던 삼십 대의 기억,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사십 대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삶의 계단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내 삶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던 것 같다. 단숨에 공간을 초월해버리는 엘리베이터의 속도감과는 거리가 먼 날들을 살았다. 한발 두발 걷고 걸어서 올라가다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진 날들도 많았다. 오르다 미끄러지고 다시 오르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엎어지고 깨어지고 구르면서 조금씩 깨달아가는 더딘 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흔히 중년을 넘기면 내리막 인생이라 한다. 올라왔을 때의 가파름과는 다르게 내려갈 때는 여유와 편안함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건 나이의 계단이고 인생의 계단은 천차만별이다. 각자 정해놓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달리는 인생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연상케 한다. 어떤 이는 몇 계단씩 건너뛰고 어떤 이는 천천히 오른다. 조급하게, 때론 여유롭게 각자의 계단을 만들어간다.

  내리막 나이에 아직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나는 9층 계단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창틀 안으로 들어온 저 황량한 풍경이 아프다. 어쩌면 풍경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앉아있어도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이가 없다. 형체 없는 바람이 창문을 기웃거리고 엘리베이터 문 여닫히는 소리만이 적막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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