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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Jun 18. 2024

원래의 자리

소설

많은 것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밖을 떠다니는 점들 사이로 선이 이어지는 장면을 건너다보았다. 어째서 그랬는가. 네게는 오직 바라보는 것만이 허락되므로. 손을 뻗어 만지려는 순간 선은 사라진다. 시야에 거룩하게 머물던 형상이 이지러진다. 나는 선택해야 한다. 바라만 보는 것과 바라보지도 못하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어떤 시도란 이미 죽은 식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많은 것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들 중에는 손가락 마디처럼 생긴 골무도 있었다. 상처가 많던 너는 골무를 살갗처럼 검지와 엄지에 끼고 다녔다. 닳아 해질 만큼 아주 오랫동안 그것은 너의 손가락과 하나였다. 골무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다시 너의 손이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 고통은 어느 순간 마모되는 것으로 다치고 또 다치다 보면 다 쓴 휴지조각처럼 잡아당겨도 딸려 나오지 않는다. 매번 새로운 고통으로 다시 채워지는 아침은 네게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기쁨을 준다.


그러나 기쁨이야 말로 내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고통이 기쁨이라면 아침은 영원히 밀어두고픈 서랍이므로. 서랍 깊은 곳에 나를 접어두었다. 나는 그곳에 가지런한 수건처럼 놓여 있다. 사방이 반듯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 나는 개어진 채로 머문다.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있었어야 할 자리. 그러나 나는 고통 속에서 기쁨을 느낀다.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손에 새로 난 상처를 뜯는다. 뜯은 자리에서 빨간 피가 난다. 지난 고름이 맺힌다. 나는 상처를 바라본다. 내게는 바라보는 것만이 허락되었으므로. 내게 상처를 낼 자격은 있어도 고통을 덜 자격은 없다. 고통은 어느 순간 마모되는 것으로 내게는 임의로 그것을 멈출 자격이 없다.


많은 것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중에는 벌어진 정신도 있다. 벌어진 정신을 어떻게 가늠하는가. 벌어진 틈으로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잔뜩 유입될 때. 정신이라는 판막이 제 역할을 못해 기도로 음식물이 넘어오고, 혈액이 역류하고, 걸러야 할 것들을 걸러내지 못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순서를 기억해 두었는데, 기억의 순서가 시계처럼. 그래, 시계처럼. 열두 시 다음은 열세시여야 하는데 자꾸 한시다. 헷갈린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 나는 원래의 자리가 어디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에 의지할 수 없을 때 기록에 의지한다. 어느 순간 마모되는 고통처럼 기억 역시도 꾸준히 마모된다. 기록은 마모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새로운 종이로 리셋되지만 넘겨 보면 전날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벌어진 정신의 틈이 문제다. 내가 기록했다는 그것은 내게 때로 완전한 새로운 사실처럼 여겨지는데 그럴 때 상처를 들여다보면 오래 전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상처를 낸 기억이 없으므로 고통 또한 새롭다. 고통이 손끝을 타고 흐른다.


많은 것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주는 태어난 이후로 하나같이 원래의 자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천체는 없다. 태어난 순간을 기념하지만 39년 전 내가 태어났던 순간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나는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 죽음에 덜 가까운 순간으로부터 죽음에 더 가까운 순간으로. 그러므로 되돌아가고 싶은 어떤 순간을 기억하더라도 나는 그곳을 바라볼 뿐 그곳으로 다가갈 수는 없다. 영원히 조금씩 멀어지는 어떤 풍경으로부터 나는 약간의 위안을 얻는지도 모른다. 정신의 틈이 허락하는 건 그런 약간의 위안이지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경직된 마음이 손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골무가 사라진 손가락에 생긴 상처처럼. 내게 상처를 만들 자격은 있어도 고통을 덜어낼 자격은 없으므로.


그러나 달이 아름답고 폭염은 심장을 더디 뛰게 만들고 비틀스의 음악은 숨을 몰아쉬게 만든다. 네 작은 어깨에 모든 짐을 지려고 하지 마. 만약 네가 싫다면 그 순간 그만둬도 돼. 하지만 기억하라고. 슬픈 노래를 더 나은 것으로 바꾸려면, 네 살갗 속으로 그녀를 받아들여야 해. 기억해. 폴 매카트니의 생일은 오늘이지만 그건 영영 돌아오지 않아. 그러므로 너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필요가 없어. 벌어진 너의 정신도. 마모되지 않는 기록과 마모된 기억과 새로운 고통과 너를 두드리는 천정의 북소리도. 계속 가. 갈 수 있는 만큼. 힘들면. 멈춰. 거기가 네 새로운 원래의 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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