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애틋했다. 그를 아들이라고 소개한 L의 눈빛에도 같은 감정이 묻어있었다. 서른 일곱 아들에게 갖는 엄마의 마음은 장맛비와 같을까. 내려도 내려도 멈추지 않는 그 사랑은 한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울는지도 모른다. 문득 엄마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언제인지를 떠올리다가 캐나다를 다녀오던 날을 기억해 냈다. 1년의 캐나다 생활을 끝내고 귀국하는 딸의 거듭된 요청으로 엄마는 난생처음으로 혼자 국제선 여객기에 올랐다. 그때 공항으로 바래다줄 때 한번, 2주 뒤 딸과 함께 귀국하는 날 한번. 그렇게 엄마와 통화했다. 한없이 다정한 L의 아들과 달리, 나는 엄마에게 살갑지 않은 아들일 것이다.
옥수수는 따는 순간부터 마르기 시작해서 수확하자마자 바로 찌든 지, 아무튼 가져온 다음에는 최대한 빨리 쪄야 한다고, L은 말했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옥수수를 반으로 쪼갰다. 꺼낸 직후에 김이 모락모락 나던 것이 금세 찹찹해졌다.
"이것 봐. 벌써 쪼글쪼글하게 말랐네. 비닐로 싸뒀어야 했는데."
벌써 반쯤 드러난 대를 입술로 훑으며 L이 말했다. 그런 L이 전화기를 펼친 것은 옥수수 하나를 대강 해치우고 다음 걸 집어들 즈음이었다. 나는 몇 알을 질겅질겅 씹다 죄책감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전화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짧은 영상통화였지만 이 모자의 유대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분명 L에게 저 아들은 특별하겠지. 그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명체를 돌보는 행위가 가진 특별함에 대하여.
한정된 대상에게만 주어질 그 특별함은 부모라면 겪을 신비한 경험과 맞닿아 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느낄 때. 궁금했다. 스스럼없이 타인을 자신의 생명과 같은 비중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나에겐 그 단어가 사랑이라기보다는 책임으로 다가왔다. 내게 심어진 사랑의 총량은 때로 나 하나를 사랑하기에도 부족했고, 그것을 쪼개 아이 하나하나에게 나누어주다 보면 마른풀같이 허기를 느꼈다. 끊임없이 용천하는, 퍼올리지 않아도 이미 흥건한 그런 사랑은 어떤 경로를 통해 완성되는 걸까. 아이들에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마른 옥수수를 질겅질겅 씹으며 입안에 굴릴 때처럼, 해갈되지 않는 책임의 질감.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을 가족의 노래.
L을 보낸 뒤 나는 카페에서 아내와 세 아이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아내의 친구 모임이 청주에서 있었고 아이들만 동행했다. 소낙비가 두 차례 내렸고 반짝 해가 내비치기도 했다. 수영장이 딸린 독채 펜션을 빌려 아이들을 놀리고 엄마 셋과 엄마 아닌 1인은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줄 옥수수 두 개를 비닐팩에 싸두었다. 비닐 안쪽으로 자잘한 이슬이 맺힌 게 보인다. 이슬만큼 사랑해야지. 저기 들어서는 익숙한 실루엣을 보며 작은 죄책감이 모인 하루를 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