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랜만이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고픈 말이 참 많았는데, 막상 전할 기회가 주어지니 망설이게 되나 봐. 나는 잘 지내. 손님을 받고 커피를 팔고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더치를 담는 특별할 것도 없고 힘들 것도 없는, 그런 평범한 하루야. 어젯밤엔 비가 왔어. 천둥번개도 굉장했고. 막내가 그러던데 짧은 동영상에서 누가 야구공을 던졌는데 그쪽으로 번개줄기가 번쩍 하고 떨어지더래. 멋진 장면일 거라는 생각은 했어. 하지만 정말 선명하게 벼락이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장면은 아직인 것 같아. 한 번쯤 보고 싶은데 눈이 자꾸 감겨. 누군가가 잘되길 바라는 일은 정말 멋진 것 같아. 아직 난 진심으로 그렇게 해본 적이 없거든.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로 야구공을 힘껏 던져주는 일이 아닐까.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어느새 여름방학이 며칠 안 남았고 벌써 개학한 학교도 있더라. 방학은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가 봐. 아이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졌고 나는 변함없이 카페를 지키지만 아내는 벌써 두 번이나 해외를 다녀왔어. 한 번은 필리핀으로 선교를 다녀왔고 이번에는 대만으로 학회에 참가하러 갔어. 공항에 태워다 준 게 지난주 목요일이었는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네. 그래서 오늘도 공항에 다녀올 것 같아. 수술한 다리가 많이 아팠나 봐. 오늘 저녁은 라면을 먹고 싶대서 끓여주려고. 꼬꼬면을 준비해 뒀는데 좋아할지 모르겠네. 반년 사이에 이만큼 커버린 아이를 봤어. 갑자기 쑥쑥 크는 시기가 있다던데 정말 그런가 봐. 여전히 깡마른 체구인데 골격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달까. 외동으로 크는 아이들은 형제가 그렇게 부러운가 봐. 다시 부산으로 가기 싫어하는 걸 보면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간 그 아이도 집보다 친구가 더 중요해지는 시기가 오겠지. 그리고 그 친구 중 누군가와 결혼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게 되겠지. 아직 너무 먼 이야기 일려나.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 새 터전에서 자라나는 걸 잠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인간이 아이를 독립시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아. 아이를 키운다는 건 나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일일 테니까. 그나저나, 네가 사는 곳은 어때? 매일이 평안하고 변함없는 그런 곳이니? 하루하루를 큰 변화 없이 살아나가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노란 승합차나 버스를 타고 내리는 저 아이들처럼, 삶이란 누군가에 의해 실려 가고 실려 오는 일일지도 모르지. 터지거나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일지도 모르고. 가끔 나는 내 삶에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모두가 내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나 감정조차도 내 손을 벗어나 있는 걸 보면. 그래서 네가 부러워. 너는 평안해 보이거든. 힘든 티도 잘 내지 않고. 매일 한결같은 삶을 살지. 어딜 가든 너는 그렇게 자신을 잘 지켜낼 것 같아. 때때로 조용한 순간을 맞이하면 그곳에 널 넣어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 고요를 반짝반짝 빛낼 성품이 네게는 있어. 나는 늘 이곳에서 사람들을 보내고 만나. 매일 보는 사람들일 때도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지. 하지만 대개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아. 제빙기에서 떨어지는 얼음 같다고나 할까. 소리는 들리지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똑같은 모양과 똑같은 형질의 만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팔 때마다 잔에 얼음을 담지만 어떤 얼음을 몇 개 담았는지 세지 않아. 그건 그저 얼음일 뿐이니까. 일시적으로 시원함을 제공해 주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공허해. 나는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해. 아무 말하지 않고도 천 마디의 말을 나눌 수 있는 친구.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그날 하루가 어땠는지 나눌 수 있는 친구. 나눈다는 말은 참 묘하지. 1을 2로 나누면 2분의 1. 2분의 1을 또 2로 나누면 4분의 1. 숫자는 작아진다고 하는데 글자는 늘어나. 이야기도 비슷한 것 같아. 이야기를 나눌수록 글자는 늘어나니까. 너의 하루는 어땠는지 들려줘. 너의 하루를 나누고 싶어. 더 많은 글자들이 남게. 네가 궁금해. 너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어떤 사람들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하늘을 보고 어떤 커피를 마시고 어떤 비를 맞았는지. 궁금해하는 건 사랑이라는데, 아무래도 이건 호기심인 것 같아. 인간은 하늘을 늘 궁금해했다고 하잖아. 그렇다고 인간이 하늘을 사랑했을까. 그건 모를 일이지. 하지만 내 생각엔 하늘을 궁금해하면서도 땅을 더 사랑했을 것 같아. 매 순간 내가 만지고 밟으며 뒤엉켜 살아가는 땅. 발자국을 남길 수도 있고 맛을 볼 수도 있고 뭉쳐 품을 수도 있는 땅.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꿈을 품는 건 그런 이유인 것 같아. 누군가의 평안을 바라는 것도, 내가 해줄 수 없는 일들을 신에게 위탁하는 것도. 이야기에서밖에 품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해 하늘의 별을 이어 붙이듯 그려보는 것도. 나는 그래서 이야기가 좋고 만날 수 없는 이 순간이 좋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역시 하고 싶은 말은 결국 꺼낼 수 없나 봐. 결말을 모르는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한 것처럼, 펼쳐보지 못한 편지가 더 아른거리는 것처럼. 너도 내게 그런 존재일까.
* 표지 : 입양 후 처음으로 얼굴을 보여준 노란 채송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