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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엔카페인 May 29. 2023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Chers passagers nous venons d'atterrir à l'aéroport Paris Charles de Gaulle Etoile.

Le commandant de bord ainsi que l'ensemble de l'equipage vous souhaite la bienvenue à Paris.”

("저희 승객들은 방금 파리 샤를 드 골 에토일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선장과 승무원 모두가 파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가 귀에 들려온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하자 Paris Aéroport라는 글자와 Paris vous aime (파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이 주변에 보이는 걸 보니 이 곳이 프랑스란 게 몸으로 다가왔다. 기자가 되고 싶어 남들보다 더 정신 없고 숨 가쁘게 달렸던 2022년 2학기가 끝난 지 2주를 막 넘긴 시점이었다. 그러나 종강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2023년 1학기 그르노블 SciencePo 1월 9일 개강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그르노블로 떠나야 했다.


교환학생이 어땠냐고 물으면 나는 멋쩍은 웃음만을 지을 거 같다. 100% 만족했냐고 묻는다면 정말 100%는 만족하진 못했다고 답할 것 같다. 나름대로 교환학생 준비를 열심히 한다고 했었으나 정작 프랑스로 가면서 불어를 하나도 공부 하지 못한 건 크나 큰 패착이자 후회가 되는 지점이다.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영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한국에서부터 겪었던 지독한 프랑스 행정은 프랑스 본토에서도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마크롱의 연금 개혁으로 인한 사람들의 분노, 시위, 파업으로 인해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 영유아보다 못한 불어 실력, 성격과 정 반대인 프랑스 생활 등 모든 점이 어우러져 외국인 신분이라는 바다 속에서 어푸어푸 했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이 글은 교환학생을 다녀온 사람들이 무작정 “교환학생 너무 행복하고 좋았어요” “교환학생 다시 가고 싶어요”라고 하는 글과는 분위기 차이가 있음을 먼저 시사한다.


#불어의 장벽은 높았다.


불어를 공부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프랑스에 간 점이 가장 아쉽다. 교환학생의 목적 중에는 분명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환경에 놓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학교 수업을 들을 때는 분명 영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상황에선 정말 많은 순간을 불어를 사용했다. 당연히 불어를 제대로 할 줄 모르니 구글 번역기에 의존하는 상황들이 많았다. 음식 주문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1월 초 중순에는 돈도 있고, 밥을 먹으려는 의지도 있으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식당에서 나와야 했던 경험도 있었다. 파리였다면 그나마 사정이 조금 괜찮았을 수 있지만 내가 있던 지역은 알프스 산맥 옆 그르노블이라는 지방 도시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불어 위주였던 것도 있었다.


살기 위해 불어를 공부했다. A,B,C,D를 에이,비,씨,디로 읽는 게 아니라 아,베,세,데로 읽는 적응이 필요했다. 이런 기초적인 것조차 공부를 안하고 왔으니 프랑스 생활 초반은 번역기가 없으면 마트에서 장보기, 휴대폰 개통하기, 은행 계좌 만들기 등 필수적인 업무들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이뤄온 스펙, 업적, 시간들이 모두 사라진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 곳에서 나는 그저 불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바보 동양인이었기 때문이다. 요리도 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중간하게 만들어 본 계란말이를 먹다가 서러운 마음에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었다.


사람이 악에 받히면 처절하게 무언가를 습득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틀린 말까진 아니었다. Je voudrais payer par carte. (쥬 부드예 뻬이예 빠 까트) = 카드로 계산하겠습니다 / Je voudrais un croque-mouche s'il vous plait(쥬 부드예 앙 크로크 무슈 씨 부 플레) = 저는 크로크무슈 하나를 원합니다. 등 친구들에게 배운 표현을 예전 어른들이 영어 발음을 한국말로 적어가며 공부한 것처럼 무작정 한국말로 외우고 사용했다. 생존과 관련 된 표현들은 자주 쓰다 보니 금방 입에 익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 불어가 발목을 많이 잡았다. 당장 SciencePo 축구팀 Lokoboca에서 축구를 할 때도 코치님 포함 모든 사람들이 불어로 이야기하는데, 나를 위해서 다른 친구들이 영어로 다시 번역을 해줘야 했다. 이 마저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훈련을 잘 치루지 못하거나 친구들과 훈련 뒤에 바에서 맥주 한 잔 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순간이었다. 프랑스 행정처리에서도 어려움이 컸다. CAF라고 통칭하는 주택보조금 지원을 위해 서류를 온라인으로 냈으나 서류에 일부 문제가 있어 반려 당했었다. 이때 서류를 직접 내러 사무실로 가야 했으나 직원이 영어를 못한다는 후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결국 프랑스 친구를 대동하고 사무실로 갔으나 서류 원본으로는 처리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서류 사본 제출을 위해 학교에서 프린트를 하려고 했으나 번역기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절차들로 인해 난감함을 겪기도 했었다. 나이만 26살이지 불어 실력과 프랑스 생활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겪었던 기억이 컸다. 당시(4월) 가정사와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불어를 조금 더 잘했다면 내가 보고 듣고 배울 수 있는 환경들이 크게 바뀌었을텐데라는 미련이 아직까지도 있는 이유다.


#의료와 행정 처리는 한국이 최고


기숙사에서 친해진 파키스탄 친구가 “한국말 아는 거 있어. 빨리빨리” 라고 농담을 했다. 당시에는 마냥 웃었지만 정말 한국이 그리운 순간에는 “이게 이렇게 빨리 안되나”라는 생각도 크게 들었었다.


당장 런던 여행 중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정형외과에서 제대로 된 검진을 받지 못한 게 대표적이다. 차에 발을 밟혀 새끼발가락에 심각한 피멍이 들었고, 급한대로 기숙사 앞 정형외과에 빠르게 Rendez-Vous(예약,약속)을 잡고 갔다. 병원에 가니 사무실 직원이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로 나를 맞이한다. 어쩔 수 없다. 이곳은 프랑스니까. Je suis désole. Je ne parler pas français(죄송해요 저 불어를 못해요)를 말하며 구글 번역을 켰다. 뭐 별거를 물어본 거도 아니다. 까트 비탈 카드 있으세요. 주치의는 있으신가요... 이런 말까지 번역기 돌려가면서 말해야 하는 외국인의 신분이란 처절했다.


그래도 의사는 영어를 좀 말 할 줄 알았다. 봉쥬흐 하고서 의사를 보자 마자 Pouvez-vous parlez anglais? (영어 할 줄 아세요?)부터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A little이었다. 의사마저도 영어를 떠듬떠듬하는 이 나라. 영국에서 프랑스로 온게 실감이 났다.


대충 사건 경위 적어둔 번역본을 보여주고, 의사가 읽더니 걸어보란다. 절뚝절뚝 하면서 걸었다. 걷는 걸 보더니 의사가 "일단 걷긴 하니까 골절은 아니시네요"라고 말한다. 엑스레이를 찍고 싶다고 말을 했다. 자기네들은 엑스레이를 찍는 게 없어서 옆에 200m 클리닉에 가면 있단다. 나는 최소한 병원인 만큼 드레싱 정도의 치료 정도는 해줄 줄 알았다. 아니었다. Cast(깁스)를 하려면 X-RAY 상 진단이 있어야 한단다. 그래서 지금은 해줄 수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으니까 알겠다고 했다. 이렇게 의사 얼굴을 10분 보는데 든 비용은 55유로, 한화 8만원이었다. 나오는 길에 의사가 "보통 엑스레이 의뢰하는데 1~2주 정도 걸려요. 전화를 해보긴 할텐데 여건이 안되면 그냥 한국가서 엑스레이 찍어보세요"라고 하더라. 뭔가 쎄했다. 일단 혹시 하는 마음에 클리닉으로 가보기로 했다.


절뚝이면서 옆 클리닉에 도착했다. 방사선과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가격은 X-RAY 한 번에 27유로(대략 3.5~4만원 정도)다. 직원이 Rendez-vous를 잡았냐고 물어본다. 당연히 오늘 의사한테 진단 받아서 왔다고 바디랭귀지, 번역기 써가며 이야기를 했다. 직원은 탐탁치 않은 얼굴로 나를 보더니 제일 빠른 날이 6/6이라고 했다. 당일에 X-RAY 촬영을 할 수 있으면 몇 시간이고 기다리려 했으나 허탈한 답변만 돌아왔다. 5/22에 프랑스를 떠난다고 하니 미안하다며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그렇게 5/23 한국 귀국 후 가장 먼저 정형외과를 방문 했고 그 자리에서 X-RAY 검진 결과 왼 발 새끼발가락 골절 진단을 받았다. 불편한 발 상태로 골절이 된 지도 모른 채 10일 동안 런던, 그르노블, 파리를 돌아다녔던 것이다.


주택보조금 지원(CAF), 건강보험(Ameli) 처리 역시 답답한 순간이 많았다. 서류는 2월에 제출했으나 CAF는 4월 말이 돼서야 처리가 됐고, Ameli는 끝까지 혜택을 받지 못한 채 귀국했다. 유럽의 행정처리가 느린 것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기에 Ça depend(싸데뻥, 그때 그때 다르다)의 태도다. 쉽게 말하면 A와 B가 행정처리를 위해 같은 서류를 동시에 냈어도 담당자에 따라 A는 통과가 되고, B는 통과가 안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프랑스에서 5개월을 지내면서 쉽지 않았던 부분들 중 하나였다.


#외국인으로 살기 이전에 해외 적응을 먼저


 2023년 채용의 화두는 ‘중고 신입’이다. 이미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경력직이 아닌 신규 공채로 입사하는 걸 의미한다. 중고 신입이 아니더라도 회사들은 인턴 등 사회 생활 경력이 있는 지원자들을 선호한다. 회사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고 회사의 분위기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 생활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교환학생, 외국 장기 거주, 이민 등 외국에 살려는 생각이 있으면 짧으면 2주, 길면 1,2달 정도 외국에서 먼저 관광객으로서 있어보고 그 다음에 교환학생을 택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차이도 클 뿐더러 미리 해외 생활에 적응을 한 상태로 가는 것과 해외에 도착하자마자 무작정 ‘맨 땅에 헤딩’으로 부딪히는 건 정말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해외 경험이 중국, 대만 등 아시아 계열이었고 유럽 생활은 전혀 해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기숙사에 살았던 한국인 A 친구는 프랑스에서 이미 고등학교 때 프랑스 1달 살이를 했었고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유창했다. 언어가 통하니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고 더 많은 정보를 흡수할 수 있었다. 내가 느낀 프랑스와 그 친구가 느낀 프랑스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렇게 싫은 얘기만 했지만 좋았던 순간이 없었으면 거짓말이다. 눈 앞에서 리오넬 메시가 골을 넣었던 순간, 그르노블에서 친해진 노르웨이 친구들과 밤새 와인과 위스키를 먹으며 놀았던 기억,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가진 이탈리아 베니스, 독일 뮌헨, 프랑스 파리 & 리옹, 영국 런던의 풍경과 기억들은 지금도 눈 앞에 생생하다.


그러나 마음만 먹는다면 이 것들은 1달 동안 유럽 관광객으로 다니며 해볼 수 있는 일들이다. 관광객이 행정에 치일 일은 많지 않고 유럽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진 뒤 다시 한 번 유럽에 올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교환학생 과정이 1달 코스도 있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과정으로 이뤄졌다. 자신이 유럽 생활(프랑스 생활)에 적합한 지 먼저 체험해보고 만족하고 행복했다 싶으면 추후 6개월, 1년 과정을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한국은 이런 체계까지는 없는 만큼 추후 유럽 지역 교환학생을 가보고 싶다면 유럽을 먼저 짧게라도 다녀와보는 걸 권유한다.


분명 프랑스에 있었던 5개월, 1학기라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취업 준비에 뛰어들 수 있는 시간 대신 겪었던 유럽은 한국에서 보고 배운 것과는 또다른 세상이었다.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라는 별명 답게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 생각을 말하는 데 거침 없었고 마크롱이 진행하는 연금 개혁으로 인해 파리로 가는 기차가 취소되거나 길거리에 불을 지르는 시위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었던 프랑스와 유럽의 분위기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외국에서 자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언어, 자본, 생활력 등 교환학생과 외국에서 살 만한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자신이 원하는 나라로 떠난다면, 그곳은 평생의 기억에 남을 찬란한 순간일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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