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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brosia Sep 14. 2020

성공한 덕후의 음악 에세이

<시골에서 로큰롤> 오쿠다 히데오

 시킨 적 없는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포장을 뜯어보니 귀여운 표지의 책 한 권과 내 친구를 꼭 닮은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적힌 쪽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네 차를 타면 항상 흐르는 음악들 있잖아.
이 책을 보고 네가 생각났어.”

​내가 즐겨 듣는 ‘최소 20-30년 전 음악’들을 항상 신기하게 여기더니 어떤 책을 보내준 걸까? 시골과 로큰롤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 무척 흥미로웠다.


 <시골에서 로큰롤>은 <공중그네> <남쪽으로 튀어> <스무 살, 도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1970년대 초중반 중고등학교 시절, 라디오를 통해 록음악을 처음 접하고 점점 마니아가 되어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려낸 에세이다. 특히 카피라이터 출신다운 간결한 문체와 톡톡 튀는 유머로 잡는 순간 단숨에 끝까지 읽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1972년 봄,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오쿠다 군은 (그는 이 책에서 스스로를 ‘오쿠다 군’이라 칭한다) 그간 열심히 모은 세뱃돈과 저금을 털어 소니의 최신 라디오를 구입한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빡빡머리가 되는 동시에 내 라디오를 손에 넣었다. 거기에는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라고 주위에 선언하는 일면이 있었다.
 소년에게 자신의 라디오란 텔레비전 앞에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보내는 시간을 거부한다는 뜻이요, 독립의 상징이었다.

​ 중학생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같은 반 학생 하나가 “오쿠다, 벌써 라디오가 있냐?”하고 부러워했을 때는 얼마나 으쓱했는지 모른다.

그래, 난 라디오를 갖고 있다고.

드디어 틴 에이저. 앞으로 멋진 일이 잔뜩 기다리고 있을 거다.
P28


 빡빡머리 중학생 소년의 귀여운 허세를 보고 있으니, 멜빵바지에 리복 하이탑을 신고 앞머리를 분수처럼 말았던 나의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중학생이란 어쩐지 그런 느낌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만으로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마인드가 존재를 사로잡아버리는.

 그렇게 매일 저녁 자기 방에 틀어박혀 라디오를 듣던 오쿠다 군은 곧 외국 팝송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오쿠다는 취미가 뭐야?” 하고 누가 물으면 나는 가슴을 펴고 “팝스!”라고 대답했다. 살짝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같은 반 학생들보다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P40


 10 년도 넘게 시대적 차이가 나는데도, 어쩜 이렇게 나랑 똑같을까? 아이들이 박남정, 변진섭을 듣고 있을 때 조지 마이클이나 마돈나의 노래를 들으면서 혼자 우쭐거리고 있던 내 모습을 들킨 것만 같다.

​ 난 당시에 모든 친구들이 듣던 이문세의 ‘별밤’ 대신 AFKN (현재 AFN) 방송을 듣곤 했다. 사실 처음부터 팝송을 좋아해서 선택한 바는 아니었다. ‘별밤’을 틀어놓고는 신경이 온통 라디오에 쏠려서 공부를 할 수 없던 탓에, 아예 하나도 못 알아듣는 영어 방송을 백색소음처럼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제목도 모르는 팝송들이 슬슬 귀에 익기 시작하고, 한두 구절씩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 생겼다. 급기야 공테이프를 넣어두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들을 무작정 녹음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일본 기후의 시골마을에 살던 오쿠다 소년이 라디오를 통해 만난 록 음악의 레코드판을 열심히 수집하며 록 마니아가 되어간 것처럼, 1990년대 서울의 변방에서 소니 워크맨 (후엔 파나소닉 시디 플레이어)를 항상 달고 다니던 귀밑 3cm 단발머리의 소녀 역시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음반 가게로 달려가곤 했었다. 그렇게 구매했던 퀸(Queen)의 베스트 앨범은 늦은 시각 야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을 언제나 함께 해주던 든든한 동반자였다.


저자의 인생앨범들과 나의 취향 중 교집합

 각 장 마다 저자가 소개하는 아티스트들과 음반 정보도 무척 유익하다. 하지만 오쿠다 히데오가 소개하는 음악들을 모르더라도 상관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어떤 종류의 음악이든 푹 빠져서 심취해본 경험이 있다면,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이를테면 ‘뉴 키즈 온 더 블록’이라던가)에 가거나 음반을 사고 싶어서 문제집 살 돈을 삥땅 쳐 본 기억이 있다면, 아니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를 들으며 일탈과 자유를 꿈꿔본 적이 있다면 분명히 이 책을 읽으며 오쿠다 군과 친구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성적을 포기하면서까지 심취했던 덕질(매니아적인 취미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오쿠다 군은 단편 소설 및 에세이를 출간했고 (음악평론가는 아니지만)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무언가에 푹 빠져 사랑했던 모든 경험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곤 한다. 팝송 제목을 알아듣기 위해 초집중하던 수많은 밤이 나에게 우수한 ‘영어 듣기 평가’ 점수라는 보상을 해주었듯이. 또는 내가 가진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소설 창작의 첫 걸음을 걷게 해주었듯이. (참조: 이 영광을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오빠들에게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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