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끼여 사는 세무대리인의 생활
소위 공무원을 갑이라 하고, 납세자인 기업 등을 을이라고 한다. 그럼 병은 누굴까? 갑과 을 사이를 조율하는 세무대리인들을 병이라고 우리 스스로 자조적으로 칭하고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공무원이었던 갑에서 바로 세무대리인인 병으로 바뀌었으니 무려 두 단계가 낮아졌다고 할 수 있는데, 갑에서 병으로 바뀌면서 느낀 점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내가 공무원이었을 때 스스로 판단하기에 나는 나름 친절한 공무원이었다. 옆에서 무뚝뚝하게 대응을 하시는 분들을 보며 나는 최대한 잘해드려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지내왔으니 나름 친절한 공무원이 되려고 노력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내부인에게든 또는 민원인 등 외부인에게든.
그런데 세무대리인으로 살아가다 보니, 갑과 을의 마음을 모두 헤아려야 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업무 특성상 갑과 을의 마음이 일치하기는 쉽지 않으니 우리들 병은 최대한 친절하게 갑과 을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데, 둘의 불편한 부분을 직접 받아내는 것은 병인 우리들의 일이다. 그러면서도 친절을 기본 스킬로 장착해야 한다. 우리는 대리인이니까.
혹자는 뭐 대단한 변화냐고 느낄 수 있겠지만, 공무원이었던 나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일이다. 공무원은 법령에 있는 대로 일을 해야 하고 법령상 쉽지 않은 일은 죄송하지만 쉽지 않겠다고 나의 의견을 주로 말씀을 드리면 마무리되었는데, 지금은 그 쉽지 않은 가운데서도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 다른 방법이 있는지를 친절하게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디어를 짜서 갑 또는 을에게 이것을 추진해도 되는지 의견을 묻는 것도 오롯이 나의 일이다.
대리인이면 당연히 고객이나 공무원의 눈치를 봐야 되는 것 아니냐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맞는 이야기지만 다만 생소할 뿐이다. 공무원 재직 시절에 공무원들이 밖으로 나가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스케줄을 내가 짜는 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시간에 맞추고 남은 시간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기존에는 회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먼저 나의 스케줄에 맞추어서 회의 시간을 상대방과 협의하고 회의를 진행했다면, 지금은 통보된 회의 시간에 맞추어서 시간을 내고 다른 스케줄 조정이 필요하면 스케줄을 조정하는 게 일상이다. 기존과 달라진 생활에 차츰 적응해 나가는 중이지만 생소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병이긴 하지만 양 쪽의 정보를 모두 알고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결과를 낼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은 심리게임에서 승리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결과가 잘 나왔을 때 양 쪽에서 감사를 표하니 보람도 2배다.
한편 스케줄도 갑, 을에 맞추어서 생활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생활에 있어서 양 쪽의 스케줄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병의 조직에서는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그 외 시간 활용에서 자유롭다는 점은 장점이 된다. 갑, 을과 조율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조율을 어떻게 할지는 오롯이 나의 계획과 역량이기 때문에 우리 조직에서 간섭하는 일은 거의 없고,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 활용을 효율적으로 해서 방법을 찾아나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