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하고 가면 역시나
나도 실업급여를 타야 하고 구직 신청을 하여야 할 때가 왔다. 집을 지키면 쌀 생기고 돈 생기는 일은 아니다. 생활은 실존이고 실존은 돈이다.
두 달은 일을 안 하고 월급을 거저 받았다. 놀고 있어도 직장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은 잘도 갔다. 한국 표준 협회에서 실시하는 ISO(품질인증) 지도사 교육 과정이 바로 시작한다.
교육에 참여하려면 노동부 해당 사업소에 구직 신고부터 먼저 하여야 한다. 교육 시작 전에 예비소집이 있다며 표준 협회 실무자가 말한다..
"구직 신고가 안 되어 있으면 교육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교육은 공짜요, 교육 기간에 교통비까지 나온다. 하루에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교육 시간이며, 주 5일 교육이 계속된다….
아침 10시가 채 안 된 때라 노동부 서울 동부사업소는 아주 조용했다.
민원인용 탁자에 자리하고는 돋보기를 꺼내면서 한심하게 지나간 세월을 느꼈다. 안경을 안 쓰면 글씨가 안 보이니….
구직표 용지를 펼친다. 성명, 주소,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만으로 따지는 나이를 적으면서 아찔했다. 내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는 30대는 아저씨고 50대는 영감이었다. 내가 바로 영감이 되어 돋보기까지 끼니 구색이란 구색은 다 갖췄구나.
주요 이력 사항으로 간다. 최종학교, 외국어 실력을 회화와 독해와 작문으로 상, 중, 하를 따진다. 날품 팔지도 모르는 판에 외국어가 무슨 소용인가. 경력 사항을 적는다. 다음은 희망직종을 써야 한다. 제1 희망과 제2 희망이 있다. 희망지역을 쓴다. 다음 고용형태는 상용, 일용, 시간제 상용, 시간제 일용이다.
최저 희망 임금은? 나는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남에게 말했고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삼미의 부회장을 하던 분이 지금은 호텔 웨이터를 아주 당당하게 하고 있다.
부회장이 웨이터를 할 정도라면 겨우 부장이나 하던 나는 정화조라도 치우러 다녀야 할 판이다.
최종 직업을 쓰는 난이 있다. 빈칸을 메우면서 직장을 시작하고 최종 직업에서 벗어날 때까지 20년 세월이 순식간에 허무의 늪 속으로 빠진다. 정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살지 못한 젊은 날은 이제 조종을 울렸구나.
실업급여를 받으려고 하면 수급 자격 신청서를 쓴다. 이제 실직자로서 절절한 실감이 온다. 내 곁에는 상업은행에 다니다가 명퇴를 한 비슷한 연배가 이것저것 묻고 묻는다.
청춘은 젊은이들에게 돌아가고 우리는 실업급여의 행렬에 섰다. 그래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선택받은 자들의 행운이다.
그동안 노동 사업소는 붐비기 시작했다. 인파 속에는 20대와 30대의 얼굴들이 중년의 나이보다 더 넘쳐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