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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종원 Aug 18. 2020

겨울나비. 46 단체사진

녹슨 훈장 처럼 남았다

한 때는 한가락 했던 업체 임직원들이 한 방에서 교육을 받은 지 여러 날이 되었다.

백수 신세이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는 누구요, 한 때는 한가락 했었소 하는 자기 인사도 없이 수업은 진행되고, 책상 위에 이름 패도 없이 그냥 뜬구름같이 교육받고, 화장실 가고, 점심 먹고 하루해가 바로 가고 한다.

50분 강의에 10분 쉬는 동안 수강생들은 강의실을 빠져나와서 비상계단이나 자판기 옆 긴 의자에 앉아서 수업 시간에 못 잔 깜빡 졸음을 달래기도 한다.

실업자 교육생들은 마냥 피곤한 기척들이다.

그 참에 오늘은 창의력 개발 프로그램을 들으러 온 다른 방 수강생들과 휴게실에서 마주쳤다.

창의력 쪽은 공무원들인 듯했다.

그들은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다.

보훈처니, 어디니 부서 명찰을 달고 있는 여직원부터 50대까지 받는다.

공무원들은 창의력이 필요하지 하면서 그들 현역을 바라보는 실직자 교육생들은 우리도 한때는 비슷한 교육을 받아 본 일이 있었지 하고 마치 까마득한 옛일인 듯 추억한다.

명찰 달리고 안 달리고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이 백수, 저 백수'로 서로 바라다보는 현실이 조금은 서운하다.

한여름 내내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강의와 조별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40명의 교육생이 교육 시작 2주일 만에 비로소 강의 시간 한 시간을 빌려서 자기소개를 했다.

중소기업 사원에서 은행 지점장까지였다.

사원 출신 총각들은 신명을 바쳐 공부하고 지점장 출신들은 집에 있기 지루해 서란다.

과거 직위 높낮이가 달랐고, 의욕에 강약이 달라도 앞으로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은 다 똑같다.

시간 중에 들어오는 강사마다 뜬구름 같은 격려를 한다.

" 교육을 끝내고도 보장을 할 수 없지만, 열심히 합시다."

듣는 수강생들에게 실망은 버릇 되고 체념으로 받아들이기에 긴 한숨 소리조차 없다.

가지고 있던 실무 경험은 쓸데없고 몸 팔 요령조차 모르는 화이트칼라의 교실이다.

어제 화이트칼라 중 이제 아무도 양복 입고 교육받는 사람은 없다.

점퍼와 티셔츠와 남방 차림이다.

넥타이에서 벗어나니 그것만이 자유롭다.

한때는 그런대로 할 만했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과거는 잊히지 않고 덧난 상처처럼 자꾸 아파진다.

서로 고통을 알면서도 고통을 덜어 줄 수 없는 처지를 안다.

지금은 모든 곳이 아스팔트 정글이다.

교육이 열흘 조금 남았다. 교육생들은 문득문득 아득해진다. 교육 후 보장이 전혀 없다.

강사들은 희망 섞인 말을 전혀 전혀 못 한다.

이제 비밀이 없다.

다들 알고 이제 갈 데까지 갔고 올 때까지 왔군 하면서도 두 달여 얼굴 익힌 인연이 아쉽고 아깝다.

저마다 의견의 일치를 보고 교육 주관 부서에 건의해서 우리 팀 단체 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제부터 예고했고 어제 또 강조해서 다들 넥타이를 매고 오거나 가지고 와서 맸다.

옥상에서 뒤로는 LG의 쌍둥이 빌딩을 배경으로 다들 모였다. 언젠가는 추억이 될 다시는 못 만날 얼굴들. 만난다 해도 이름도 성도 기억 안 날 시간이 정녕 오련만 행여 기회가 오면 의기투합하거나 전화 한 통화의 여운을 달려는 마음들이 조금씩 있다.

사진 맨 앞줄은 20대, 둘째 줄은 30대, 셋째 줄은 40대, 넷째 줄은 50대와 60대가 섰다.

앞줄과 뒷줄은 아들과 아버지 세대다.

오랜만에 맨 넥타이가 조금씩 불편해질 무렵 찍기가 끝났다.

먼 날, 사진 한 장이 누구에게는 추억일 테고 누구에게는 인생을 도와줄 인연이 될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던 어느 시절 남남과 사진 찍기는 서먹하나 동병상련 의기투합이었다.

교육이 거의 끝나가면서 단체 사진까지 찍었는데 실업자 면하는가?

질문하는 사람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그냥 단체 사진 한 장만 달랑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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