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섬김으로 빛나는 영적작품
섬김과 순수 신앙 (엡 3:7-13)
많은 사람들이 순수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오해를 하곤 합니다. '순수'라고 하는 단어 때문에, 진정한 예술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를 거짓 없이 표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대중을 의식해서 유행하는 그림을 쫓는 예술가들은 그들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받게 되고 그것은 곧 그들의 작품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유행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고 개성 있게 표현해 내는 예술가는 비록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결국에는 그 순수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예술은 반드시 자신의 작품을 관람할 대중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신의 표현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 자체가 결국 사람과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음의 생활에서 개인의 신앙이 순수 예술의 측면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순수한 신앙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주로 나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생각하게 하지만, 결국 신앙은 누군가에게 표현되는 '영적 작품'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로하기도 하고, 도전을 주어 마음에 불씨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11-12절 읽기) 그 당시 교회에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성령의 계시로 말씀을 풀고 앞 날을 예언하는 선지자,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의 직책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모든 직책을 가지진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큰 교회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직책이 있습니다. 반면 저희 교회처럼 작은 교회는 초대교회보다 직책이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직책은 그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모든 직책의 임무는 한 가지입니다. (12절 다시 읽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고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진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은 '섬김'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누가 높은 지를 두고 다툴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에이, 목사님. 예수님께서 섬기려고 오셨다는 건 저도 너무 잘 알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의미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ROTC였을 때, 리더십 수업 발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후보생들이 '솔선수범'에 대해 말했습니다. 솔선수범의 사전적 정의는 '남보다 앞장서서 행동해서 몸소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됨'입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손으로 가리켜 지시하지 않고 먼저 그 일을 행해 아랫사람이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로 많은 후보생들은 리더십에서 솔선수범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전 그 반대로 발표를 했습니다. '만약 솔선수범을 통해 누군가의 행동을 촉구하거나 그들의 행동을 고칠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서번트(종) 리더십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솔선수범과 섬김을 구분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섬김까지 가지 않고 솔선수범에서 멈췄다면, 억울한 누명과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마지막 자리가 십자가인 것을 미리 알고 계셨고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은 우리 죄의 결과이고 그로 인한 죽음은 우리의 몫인데, 예수님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섬김의 자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섬김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솔선수범에서 멈출 때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설거지 하고 청소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따라 하겠지, 내가 먼저 잘못을 용서해 주면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감사를 표현하겠지, 이 사람이 못한 일을 대신해주면 나중에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겠지. 문제는 내가 열심히 설거지 하고 청소하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힘들게 용서해 줬는데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어려울 때 도와줬더니 내가 힘들 때는 연락도 없습니다. 무엇이 필히 찾아옵니까? 실망이 찾아옵니다. 솔선수범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섬김은 다릅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설거지와 청소를 자신의 일로 여깁니다. 힘들게 용서하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 역시 자신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수많은 어리석은 행동들과 배신과 억울한 누명과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제자들과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낮은 자리를 진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여기는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기대를 품고 행하는 솔선수범에서 멈추지 말고, 봉사와 낮은 일을 진정으로 자신의 일로 여기는 섬김의 자세를 가지십시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르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마르다에 집에 들어갔을 때,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반면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열명이 넘는 손님이 찾아왔고, 큰 능력을 행하는 예수님이 오셨는데 손님 대접을 위해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결국 마르다는 예수님께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이 장면을 볼 때, 마르다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마리아에게 어떠한 일도 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자신이 바쁘게 일하는 것을 예수님, 혹은 마리아가 깨닫고 그 일을 돕길 내심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마리아도 마르다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자, 마르다는 결국 불평을 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불평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마르다가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것만큼이나 좋은 일이 맞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큰 결례로 여겼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르다의 행동을 잘못했다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손님 맞는 일을 섬기는 자세로 하지 않고 솔선수범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은 봉사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그녀의 마음은 인정에 대한 욕구, 혹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손님을 맞는 일을 솔선수범이 아닌 섬김의 자세로 온전히 자신의 일로 여겼어야 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습니까? 그 은사가 무엇이든 그것은 반드시 섬김의 열매를 낳아야 합니다. 혹시 담당하고 있는 직책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된 지체로서 담당하는 직책이 무엇이든 그것 역시 반드시 섬김의 열매를 낳아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연결되고 도움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순수 예술이 아무리 순수해도 결국 작가의 표현을 세상에 드러내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본질인 것처럼 순수 신앙 역시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와 은사와 직책을 결국 섬김의 자세로 봉사하여 다른 지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본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