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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Jan 29. 2024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는가 (마 7:21-27)

분주한 삶에서 믿음이 우선순위에서 멀어지고 있진 않나요?



사람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꿈이 있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럽거나, 굉장히 슬프거나, 혹은 굉장히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나는 꿈이 그렇습니다. 제가 정말 싫어하는 꿈은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실수로 여권을 집에 두고 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게이트를 통과하는데, 비행기 시간을 앞두고 다시 집에 다녀와야 하나, 아니면 집에 전화해서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또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 직원에게 사정이라도 해 봐야 하나 싶은 절박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실제로 여권을 집에 두고 공항에 갔던 경험은 전무하지만, 여권 없이 공항으로 나서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간혹 꿈에서 경험하곤 합니다. 아무리 즐겁고 분주하게 여행을 준비해도 여권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짐을 완벽하게 챙긴다 할지라도 손바닥만 한 여권이 없으면 그 짐은 게이트를 통과해 지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이 열심히 챙겨서 들고 온 물건의 가치가 비행기 티켓값의 수십 배가 넘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주고, 해당 국가에 대한 여행 자격을 인정해 주는 여권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제자들과 사역을 하실 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기적의 대상이 되어 날 때부터 가졌던 병이 치유되기도 하고, 들렸던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여권'을 가진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게이트까지는 왔지만, 그 게이트를 통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한 마을에서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붙들고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 간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일 것을 명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몸을 보여 깨끗함을 받게 되자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4:17-1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종종 예수님을 찾아와서 병을 고침 받는 자들 중 구원을 함께 경험하는 자들이 많아 병 고침과 구원을 동일한 것으로 여길지 모릅니다. 물론 그 자리는 매우 비슷합니다. 어쩌면 손을 뻗으면 닿을 자리일지 모르지만, 그 사이에는 그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게이트가 놓여 있습니다. 한 사람은 믿음으로 그 게이트를 넘었지만, 한 사람은 믿음이 없어 그 게이트를 넘지 못한 것입니다. 병 나음을 받았던 나머지 아홉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그의 말씀을 잠시 의지함으로 자신의 병이 나았을진 모르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이 되는 역사까지 나아갈 믿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경험하고 또 심지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지식적으로 이해한다 할지라도, 믿음이라는 여권이 없다면 이 모든 지식이 가진 의미는 마치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한 수많은 짐처럼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던 당시 그의 능력이 헤롯왕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이 과거에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영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방신에게 대적하고 유대교의 전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는 자신들을 탄압하는 정권과 로마에 대적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집권하던 헤롯왕은 비록 출신이 유대사람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친로마 성향이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헤롯왕에게 큰 골칫덩어리였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동생의 아내와 장가를 간 것에 대해 세례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는 지적을 했으니 이를 가만히 두면 자신의 권위가 추락하고 세례 요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더욱 많아질 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이 세례 요한을 함부로 죽이지 못한 이유를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19-20)


이 말인즉슨, 헤롯왕은 세례 요한이 전하는 말을 두려워하며 또 한편으로는 즐거워하며 들었지만, 세례 요한이 하는 말대로 사는 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잔치를 열었을 때,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어 했던 헤롯왕의 아내 헤로디아가 자신의 딸을 시켜 왕 앞에서 춤을 추고 소원을 하나 빌도록 꾀를 내었습니다. 헤롯왕이 헤로디아의 딸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소원이라면 주겠다고 그 자리에서 약속하자, 그녀는 지금 당장 세례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올려달라는 소원을 빌고 결국 헤롯은 그녀의 소원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쳤습니다. 말씀을 알고 두려워하고, 또 이를 기뻐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믿음을 담지 않으면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낭송하는 사도신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정말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작정을 하고 빌라도 앞에 세웠습니다. 빌라도가 회중에게 던진 첫마디는 자신은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9:12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 주려 힘썼던 장면이 등장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고난을 당했다고 말합니까? 그 일의 결정권자가 결국 빌라도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면 그 앞에 아무리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유죄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죄가 없이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대중의 말을 듣고 그는 예수님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헤롯왕도, 본디오 빌라도도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짐을 핑계로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을, 예수님의 생명을 취한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한 청년에 대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젊은 청년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고치기 힘든 병에 걸려 죽을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병이 나으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청년의 부모님과 해당 교회의 목사님이 그 청년을 위해 날마다 기도한 끝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다고 판정한 질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청년은 자신의 질병이 낫자 자신이 서원한 것과 달리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얻게 된 건강에 대한 자유를 유흥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청년은 결국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저는 한 때 그 청년이 가졌던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건강을 얻었을 때, 자신이 처음 가졌던 마음을 잃어버리고 변질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청년의 어리석음을 보며 혀를 찰지 모르지만, 사실 이 청년의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자연스레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저희 집 앞에는 손잡이가 망가진 웨건이 반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처음 망가졌을 때부터 항상 이제 AS 보내야 하는데, 하면서 미룬 지가 벌써 반년가까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그것을 수리하는 우선순위가 제 삶에서 맨 끝자락에 걸쳐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인생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가진 믿음이 저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웨건과 같은 존재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아무리 분주하다 할지라도 여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짐을 싸면서 한번, 나가면서 한번, 차에 타서 한번, 공항에서 한번 계속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여권입니다. 다른 모든 짐은 상황에 따라 버릴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 모든 것을 버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게이트를 열게 해 줄 여권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은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 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1-23)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예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과 천국의 열쇠가 믿음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날마다 이 믿음을 확인하고 중요한 우선순위로 올려놓지 않는다면, 나중에 그 믿음이 필요할 때 어디서도 찾지 못해 당황하는 상황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믿음을 기반으로 설정하여 언제 어디서든 그 믿음을 꺼내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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