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에서 점 하나를 찍어 '남'이 되어 살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것들은 하나하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을 보실 때 그것들은 심히 좋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것 하나하나 모두 좋지만, 그 모든 것들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은 심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신 후에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해 그의 아내를 만들고 아담은 자신의 아내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하며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
부모와 자식은 피로 이루어진 생물학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모든 자식은 부모의 다양한 모습을 부분적으로 닮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부모와는 언젠가 이별을 합니다. 부모와 이별을 한다는 것은 또한 더 나아가 나의 피가 섞인 나의 자식과도 언젠가 이별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나와 연결점이 없고, 출생부터 먼 곳에서 시작된 아내는 자신과 한 몸이 되어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 인연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나의 갈빗대 중 하나를 취해 나의 일부가 될 인연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부부의 만남은 결국 각각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선한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심히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나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 역시 필요합니다. 만약 부부의 만남이 내가 결정한 일이고, 내 피가 섞인 자녀가 더 중요하고, 부부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시도로부터 저항하지 않는다면 흔히 우리나라의 가요의 한 구절처럼, '님'에서 점 하나를 찍어 '남'이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지어진 모습과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통해 죄가 들어온 뒤에 보기에 좋지 않은 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죄인 줄 알면서 자신의 남편도 먹게 했습니다. 아담 역시 그러한 행위가 죄인 줄 알면서 선악과를 먹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책망할 때, 하와가 주어서 먹었다고 변명할 뿐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향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는 명칭으로 자신과 아내를 한 몸이 아닌, 다른 주체로서, 그리고 대적으로서 하나님께 고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 역시 인간의 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성경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공부하고 또 그것을 묵상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잘 드러나 있고 또한 그 계획을 통해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부부의 인연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영적인 이해가 없을 때, 가정은 흔들리고 자녀들은 방황하며 이혼은 유행처럼 번질 수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이혼이 필요한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수한 것이 아닌 일반적으로 여기는 마음은 가정을 세운 하나님의 계획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부라는 인연이 보이지 않는 영적 원리에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 더 관계가 깊고 끈끈하도록 정해놓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성경이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이 가르쳐 주고 보여주는 식으로 기준을 정하게 됩니다. 다들 하니까 나쁜 것이 아니고, 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르고 잡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잘못했다'가 아니라, '재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옵니까?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죄를 저지르는데, 하필 자신이 잡힌 것을 재수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법이라는 기준조차 진정한 '법'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세상의 법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잘못한 모든 사람의 죄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법 개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전에는 죄가 아니었던 행위였는데, 죄가 되기도 하고, 죄가 아니던 것이 다시 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처음 정한 뒤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유부재 하시고 쉬는 날이 없으며,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헤아리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따르며 세상에서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죄로 여길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괜찮다고 말하는 일에 괜찮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능력이 있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리석은 일이다 말하는 일에 가장 좋은 일이다 말할 능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은 인간이 저지르는 죄를 그 형태를 가지고 판단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한 사람의 범죄가 물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하나님의 율법과 얼마나 거리가 먼 지 판단합니다. 죄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의 본질은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범죄는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빼앗는 데서 발생합니다. 스스로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마음에 그것이 법에 어긋나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마귀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이 되거나, 혹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마귀가 얻는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분열입니다. 원래 있던 것이 그 모양을 버리고 찢어져 나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보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에 분열을 일으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 세대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가 좋은 대로 행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조는 급속도로 번져서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을 남기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쓸어버리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죄는 바이러스와 비슷합니다. 대처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전염을 피할 수 없습니다. 2021년에 한국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질 때, 우리는 그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다양한 대처를 개인적으로, 그리고 우리가 속한 집단에서 지혜롭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전염성이 강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 이상 코로나 바이러스에 전염되었지만, 사실 그 전염에 대한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준비를 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바이러스가 나쁘고, 그것이 전파되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대처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서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죄가 나쁘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날마다 확인하고, 그것이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마음이 선한 것에서 분리되고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언어가 분열을 일으킬 때, 내 삶이 죄로 물들고 있다는 것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영적 기민함이 필요합니다. 노아 시대에는 이러한 사람이 노아 밖에 없었습니다.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죄를 죄라고 말해 줄 사람이 없고, 그것과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세상을 쓸어버린 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6:21)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세상의 심판을 미루고 자신이 더욱 인내하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머잖아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전하는 자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아담의 죄가 이루어진 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방도를 정하셨습니다.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거짓을 말했던 뱀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15) 성경을 읽다 보면 가장 읽기 싫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족보를 나열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는 사실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 족보를 처음부터 계속 연결시키다 보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한 '여자의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발꿈치는 생명과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체 하나님과 동일하시기 때문에 죽음을 만드신 분이지 죽음에 지배를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가 그가 죽음을 한 번 경험하게 할 수는 있지만 절대 예수님 위에 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꿈치가 상하는 자리, 그 십자가의 자리에 올라 선 것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결국 뱀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머리는 신체의 모든 기관 중 생명과도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의 된 것이 아니라, 결국 뱀, 곧 마귀의 죽음이 된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으니, 이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 그것이 인간을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죄가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은 죄를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것임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대신해서 지고 죽음이라는 값을 치르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는 것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랑을 의지하는 것으로 죄와 대적할 능력을 얻고 그것을 전하는 자가 되어 세상을 분열시키는 죄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미워하는 노력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에 더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깊이 묵상함으로 우리는 죄를 온전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분열을 만들어내는 마귀의 악한 계략을 분별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회복시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