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 빈곤, 가지지 못한 욕망을 벗어나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많은 사람들은 풍요 속에서 빈곤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가진 것은 점점 늘어나고 그것의 질은 좋아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 속에서 점점 삶에 대한 만족도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느끼는 행복과 만족은 자신이 가진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에서의 분수와 같습니다. 자신이 가지길 원하는 것은 분모,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은 분자입니다. 즉 자신이 가진 것이 10인데, 자신이 원하는 것도 10이면, 그러한 사람이 느끼는 만족도는 100%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가진 것이 10이지만, 자신이 가지길 원하는 것이 100이면, 그러한 사람이 느끼는 만족도는 10%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불평이 많아지고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것, 즉 분자의 숫자가 작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늘어나는 것보다,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믿는 것, 즉 분모의 숫자가 더 빠르게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대중 매체가 발전하고 인터넷이 보급되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생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은 단순합니다. 분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분모를 줄이면 됩니다. 즉, 나의 소유를 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져야 한다고 믿는 것을 줄이는 것이 인생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분자와, 내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분모로 계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10이고, 내가 기대하는 것이 10이라면 신앙에서의 기쁨은 100% 충만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것이 20이나 되는데, 내가 기대하는 것이 100이라면 신앙에서의 기쁨은 고작 20%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할 것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단순히 작은 것에도 감사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의 모든 순간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말입니다. 즉, 어느 순간에서든 100% 만족하고 행복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한다고 믿는 것들, 우리가 가져야만 한다고 붙잡고 있는 것들, 즉 분모를 1에 수렴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우리는 ‘겸손’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다가올 것들을 우리만의 방식을 사용해서 예측합니다. 지금까지 잘 지켜온 건강이 앞으로의 건강을 당연히 보장해 줄 것이며, 지금까지 차곡차곡 잘 모아둔 재산이 앞으로도 내 삶을 부족함 없이 지탱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해 내는 땅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홍해라는 출발 지점에서 그들은 거대한 승전을 올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전심으로 높이며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삶은 순식간에 그들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가졌던 경험과 현재 상태를 비교했으며, 더러는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들과 다른 경험을 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자격‘이라는 교만함을 내세웠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께 구원받고 좋은 것을 누리며 평안한 삶을 살 조건이나 능력을 갖추었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에서 넘어지는 이유와 상당히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당연하고, 나에게 시련이나 고통을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 기준이 마음속에 자리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최근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민생소비쿠폰이라는 현금성 바우처를 전 국민에게 주었습니다. 이를 1차와 2차에 나누어서 주었는데, 논쟁이 된 것은, 1차에는 전 국민이 모두 이를 지급받았는데, 2차에는 재산상 상위 10% 국민들은 대상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물론 정부에서는 현금성 혜택을 굳이 상위 10% 국민들에게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 대상에서 제외된 10% 국민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에 대해 불만을 제기합니다. 그들은 마치 10만 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에서 10만 원을 뺏긴 것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당연하다고 믿고 예측한 것이 자신의 손에 잡히지 않으면, 그것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실망감을 느끼는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훌륭한 예배자로 서있어도 내가 하는 사업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산다 할지라도 내가 겪는 고난이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자들을 전도한다 할지라도 당장 내 가족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하나님을 불의하다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
토기장이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 그릇의 필요는 오로지 토기장이가 정합니다. 그런데 지음을 받은 토기들이 자신들의 외모와 쓰임을 비교하며 누가 더 나은지 판단하고, 특정 토기에 대한 애정을 시기한다면 이것은 토기장의의 의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과 삶을 보며 왜 자신은 저 사람처럼 살지 못할까, 왜 나는 저런 위치에 올라가지 못할까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탓합니다. 저도 청년 시절에 여러 컨퍼런스를 다니며 강연하는 목사님들을 보고 나도 저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속에는 복음을 전하는 본질보다 형태, 즉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으며 삶에서 극적이고 감동적인 믿음의 스토리텔링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특별 사랑을 받고, 특별 인도하심을 받는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전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나,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나, 그리고 앞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을 하나님은 모두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점, 심지어는 단점까지 모두 자신의 영광을 위해 예비하셨으며, 이 모든 것을 통해 협력해 선을 이루도록 모든 것을 계획하신 우리의 주인입니다. 저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질그릇도, 가장 눈에 띄며 사용 빈도가 높은 반짝이는 그릇도 결국 토기장이의 계획에서는 모두 완벽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신앙인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타내는 분자와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을 나타내는 분모가 항상 일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10이면, 내가 가져야 할 것이 10이라는 것을 깨달으니 삶의 만족이 100%가 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20이면, 내가 가져야 할 것이 20이라는 것을 깨달으니 마찬가지로 삶의 만족이 100%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삶에서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불만과 원망이 생긴다면, 분모가 분자를 추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한 것보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훨씬 더 앞서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와 구원을 기억하며 값없이 주어진 자신의 구원으로 분모 값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아시며, 그 사랑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다는 것을 되새기십시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바울의 권고가 더할 나위 없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