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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구원 (갈 2:16-21)

세상의 가치가 구원의 가치보다 큽니까?

by Sue Park



세상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의 법이 있으며,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법 중 하나에 속해 살아갑니다. 하나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율법이고, 하나는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인간을 마지막으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한 가지 법을 주었습니다. 그 법은 인간이 스스로를 낮춰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구분하고 섬기는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을 유혹하는 마귀가 하나님의 대적인 것을 증거 하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낮추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꿈꾸며 그 법을 어겼고, 결국 그 법은 인간에게 저주가 되어 태어나는 모든 자들이 율법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운명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막대한 빚을 진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자식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갚을 수 없는 빚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중, 고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미술부 클럽 활동을 했는데, 중학생 시절이던 때는 선후배 관계가 매우 엄격했고, 선배들로부터 얼차려를 받는 일은 거의 매주마다 있었습니다. 당시 이 얼차려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선배들이 내주는 과제를 일주일 동안 모두 수행해야 하는데, 선배들이 요구하는 완성된 그림의 양은 아무리 노력해도 채울 수 없는 양이었기 때문에, 부지런하고 게으르고를 떠나 결국 모든 동기들은 얼차려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아무리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완성할 수 없는 그림처럼, 끊임없이 순종해도 정해진 분량의 율법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돈은 노력하면 빚의 양이 줄어들고, 그림도 완성한 작품 수만큼 얼차려의 강도를 줄일 수 있지만, 죄에 대한 값은 죽음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가벼운 죽음이나, 당해도 괜찮은 죽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노력과 수고라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해낼 수 없다는 절망과 좌절감을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망과 구원은 적당한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16).

인간은 이미 율법에서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반대로 우리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으로 죽게 된 모든 인간을 율법이 아닌, 은혜의 수단인 믿음을 통해 우리를 다시 살리기로 하셨습니다. 16절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겠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율법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신이 가지고 있는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으며, 그 방법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는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도 바꿀 수 없고,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그 말씀을 뒤집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서 본 모든 말씀을 통해 구원에 대한 두 가지 조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두 번째는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죽는다는 것인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에 대한 비유를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고나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1-4)

남편과 혼인한 여성이 서로 정해진 법적 관계를 벗어나는 방법은 남편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성은 다른 남자에게 가더라도 정죄받지 않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면 율법의 효력은 우리에게서 사라지게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정한 법이므로, 폐할 수 없으니, 결국 그 결혼을 파하기 위해선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은혜가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예수님께서 나 자신의 죄로 인해 죽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마치 그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과 동일하게 여겨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진짜로 죽은 뒤에 어머니의 몸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번거로운 거듭남, 실제로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가 실제로 율법에 대해 죽은 것으로 여겨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누군가가 단번에 갚아 주었는데, 그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도 그 빚을 갚은 사람의 이름이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힘입어 바울은 자신의 삶을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20절 읽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한 번 죽은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었어야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 율법에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들입니다. 행위로 구원에 이르는 법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마찬가지로 행위로 죽음에 이르는 법에서도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죄를 이겨내는 고단한 노력이 원동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발적인 순종이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자신의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절제하며 구원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직장에서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상사에게 온갖 아부를 떠는 것과 비슷합니다. 앞에서는 그를 높이고 만족시키며 그가 기뻐할 만한 일들을 가리지 않고 행하지만, 그것의 동기가 기쁨이 아닌 생존이라는 두려움에 있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마치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준 은사를 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에게 대가를 바라며 노력하고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위해 행한 일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부를 전하고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동기는 기쁨과 감사함에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이러한 동기에서 발견됩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매주마다 등원하며 콜라를 사서 저에게 주는 학생이 있습니다. 제가 음료수를 제로콜라만 마시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이 먹을 것을 사면서 제 것을 하나씩 사 오는 것입니다. 가격이 부담되니 사 오지 말라고 자꾸 이야기를 해도 참 끈질기게 사 옵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해도 받을 때마다 참 고맙고 힘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꾸 학원에 늦게 와서 한마디 했더니 그 친구가 “그래도 제가 매번 선생님 콜라도 사주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콜라를 주고 결석을 합리화한다면, 그 콜라는 대가성 향응이 되는 거네?” 그러자 그 친구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마음이 참 따뜻하고 선생님을 생각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 있길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그토록 막기 어려운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처럼 마음속에 생겨나는 ‘대가성 향응‘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가성 향응이란, 쉽게 말해 무언가를 해 주었으니 그 대가로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를 갖는 제공이나 접대를 말하는 일종의 정치적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이 자신에게 갚아야 할 빚을 쌓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마 6:33). 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대속해 준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모자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구원을 받았음에도 삶에 변화가 없고 감사가 없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가는 모습은 결국 구원의 가치가 세상 물질의 가치보다 가볍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구원의 무게를 달아보십시오. 그 구원의 감사함이 여러분의 삶에 어디까지 미치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그 구원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을 어디까지 바꾸어 놓았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구원입니까, 가벼운 구원입니까, 아니면 압도적인 구원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절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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