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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고전 15:1-10)

물질이라는 세상의 기준을 넘어서

by Sue Park


학원에서 행사를 진행하며 레크레이션을 진행할 때, 혹은 집에서 아이들과 게임을 할 때, 정해진 규칙을 그대로 적용해서 진행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학생들에게 맞춰야 할 특정한 퀴즈 문제를 낸다면 그것은 분명히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어렵고, 고학년 아이들에게는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추가적인 규칙을 적용하거나, 특정 규칙을 제외시켜 줍니다. 이런 어드벤티지를 저학년 학생들이 받으면, 고학년 학생들은 그것이 불공평하다며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지만, 사실 이러한 변칙이 오히려 그 게임을 공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큰 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작은 것을 가집니다. 어떤 사람은 부주의한 식습관을 가졌음에도 잔병치레 하나 없고, 또 어떤 사람은 몸 관리를 철저히 해 왔음에도 심각한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려운 문제를 맞히는 게임에서 정해진 규칙대로 저학년과 고학년을 그대로 두는 것처럼, 이길 수 없는 경기, 반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와 강한 자를 잘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이 경기에 개입해서 특정한 규칙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지으신 분이시므로, 언제나 약자가 강자와 동등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미 하나님을 잘 알고 그를 섬기는 바리새인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가 많은 세리나, 창기, 그리고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과부와 선조의 죄로 인해 판단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중 예수님은 누구의 친구가 되셨습니까? 바로 후자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바리새인들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있었으며, 그것은 곧 그들이 받은 것에 대해 주인의 뜻대로 써야 할 책임을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가진 것이 적고, 가난하고, 약하고, 무시받고, 천대받고 심지어 죄가 있는 자들은 주인에게 받은 것이 적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치료자가 되고 위로자가 되어 오히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역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처럼 낮은, 가난한, 그리고 약한 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는 귀한 은혜를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나 세상에서는 바리새인처럼 높은, 부유한, 그리고 강한 자들이 되고 싶어 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지닐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우승, 즉 ‘성공‘이라는 키워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규칙은 바로 물질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최근 매우 뜨거운 몇 가지 경제 관련 소식이 있습니다. 코스피가 3,700을 넘기는 신고가를 기록했고, 금 값이 올해에만 약 50% 상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 시장에 뛰어들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금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는 소식을 하루가 머다 하고 듣게 됩니다. 주식이나 금으로 수익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들지 못하면 자신이 뒤쳐진다는 불안감과 앞으로 더욱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이러한 행동을 더욱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든, 그리고 마음껏 돈을 벌고, 돈을 가지고, 또 그 돈을 쓸 수 있고, 당연히 그래도 됩니다. 돈은 그 자체로서 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처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은지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마귀는 세상에서 물질이라는 기준을 두고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 불평하게 하고,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신의 소유를 채우는 것을 삶의 중요한 목표로 고정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강점은 가진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가운데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신학적으로, 성화의 과정은 점진적으로 일어나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려나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러한 과정 없이 단번에 큰 변화를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이러한 사도 바울처럼, 자신이 가진 부족함과 연약함을 세상적 가치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이라는 세상의 기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제가 살림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마음속에 가장 고민이었던 것 중 하나는 교회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 괜찮은 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막상 이러한 조건을 다 맞춰서 교회를 개척할 생각을 하니, 준비할 것이 상당히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제게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럼 이 은사를 하루라도 빨리 사용해서 영혼을 구원하고 도전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제게 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제가 받은 것이 적다고 투덜대는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는 주인에게 달란트 받은 종 비유가 등장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으로 장사해서 다섯을 더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 역시 장사해서 두 달란트를 남깁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 한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숨겨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가진 것이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내쫓기게 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은 그것으로 주인이 원하는 의도대로 더 많은 것을 남기라는 의미인데,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묵혀두고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제가 말씀에 대한 은사를 받았는데, 이것을 적절한 때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묵혀두다 결국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저도 이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결말을 맞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비단 말씀에 대한 은사를 받은 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믿음을 통한 구원과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삶 역시 이러한 은혜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특정한 달란트를 여러분께 맡기셨습니다. 본문 말씀 10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우연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며, 또한 헛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은혜가 우리의 삶에서 실천이라는 열매로 드러날 때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은 삶을 살고 계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과정을 걸으며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도를 참 잘 들어주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도를 잘 안 들어주신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이것이 참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혔는데, 천사가 그를 깨우는 장면이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합니다. 그 장면에서 제가 재밌어하는 말씀은 바울을 깨우는 천사의 방식인데,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웁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다 갇혀서 양손이 묶여 피곤해 잠든 사람을 위로하고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옆구리를 쳐서 깨운다? 너무 막대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비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위로를 받아야 할 만큼 베드로가 더 이상 약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난을 주실 때,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를 거절할 때, 그것을 자신을 너무 막 대한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히려 여러분이 그것이 없어도 감사할 수 있고, 그러한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승리의 역사를 쓸 만큼 믿음으로 성숙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물질에 대한 성공으로 시끄러울 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며 그가 주신 은혜를 헛되이 묵혀두지 않고 누구보다 수고함으로 그 은혜의 깊이를 삶으로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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