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지금 꿈이 있습니까?
아브라함 이후로 시작된 이스라엘은 솔로몬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번성과 번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불순종과 교만함이 채찍이 되어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되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나라가 망하거나, 모든 것이 빼앗기는 형태로 나타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빈도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들의 죄는 온 나라가 불타고,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는 불채찍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성전을 잃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죄를 돌이키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속히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심판 속에서도 그들은 생명을 잃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을 다시 한 번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아 끔찍한 학살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까지 큰 틀에서 이스라엘을 돌아보면,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성공과 번영이 언제나 믿음과 회개, 이 두 가지 과정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정치나 군사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의 문제였습니다.”
첫 번째 믿음은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 언제나 내 능력을 넘어서는 특정한 상황에 나 자신을 노출시킵니다. 군대에서 소대장으로 있을 때, 자기개발 시간 동안 자신의 꿈을 적어내는 시간을 가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꼭 자신의 꿈을 ‘무사전역‘이라고 써내는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전역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 나의 상태와 나의 기대를 상당히 벗어난 것을 꿈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꿈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믿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 중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전쟁은 그 당시 인간이 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앞에 섰을 때,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확신하며 겁에 떠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잠잠히 서서 오늘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이루실 큰 구원을 보라.”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고, 수십만에 이르는 모든 에굽 병사들은 모두 수장을 당했습니다. 보병과 기병은 육지에서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들이 수장당하는 일은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호수아 때 여리고 성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성벽, 그리고 힘으로는 넘어뜨릴 수 없는 그곳에 살고 있는 거민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낙담시켰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그곳을 지키는 자들이 자신들의 밥이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그들이 한 일은 성 주변을 도는 일과 마지막 날에는 성을 향해 함성을 지르는 일뿐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승리한 전쟁은 바로 히스기야와 앗수르의 전쟁입니다.
히스기야 때 이스라엘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중 하나로 묘사됩니다. 나라는 주변 국가에게 조공을 바쳐 남아있는 것이 없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강력한 군대로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으로 올라가 마지막 보루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너희의 신이 너희를 과연 구원하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직접 하나님께 듣고자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 알리이다.”(사 37:20) 바로 그 기도를 드리고 다음 날 아침, 진영을 떠나 앗수르 군대를 정찰하러 갔더니 그곳에는 시체밖에 없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를 드린 그날 저녁,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치른 역사적 전쟁들은 이처럼 사람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전쟁은 보병을 수장으로, 두 번째 전쟁은 고함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세 번째 전쟁은 하나님의 사자가 하룻밤 사이에 십팔만 오천 명을 쳤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정말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꿈 같은 이야기 뒤에는 바로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꿈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꿈은 정말 여러분의 삶에서 꿈 같은 일이 맞습니까? 믿음으로 꿈을 꾸십시오. 나의 방식으로, 나의 노력으로, 나의 시간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질 만한 놀라운 일을 바라보고 꿈을 꾸십시오. 매일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꿈꾸고 그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합니다, 아니 약해야 합니다. 나의 방식과 나의 계획이 틀어지는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방식이 실현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떠나 홍해 앞에 섰을 때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떠는 시간이었습니다. 40년의 여정을 지나 난공불낙의 여리고성 앞에 도착한 이스라엘의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후회와 탄식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빼앗길 것이 없자 앗수르의 침략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은 조금의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절망 상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삶에 이러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은 두려움, 후회와 탄식, 혹은 절망의 상태에 빠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드러내고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간입니다. 저희 동네 고깃집에 슬픔에 대한 반응을 묘사한 재밌는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슬플 때 우는 건 삼류요, 슬플 때 참는 건 이류요, 슬플 때 먹는 건 육류다.” 전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이처럼 묘사하고 싶습니다.
“고난이 닥쳤을 때 우는 건 삼류요, 고난이 닥쳤을 때 그 고난이 지나가도록 기도하는 건 이류요, 고난이 닥쳤을 때 그 고난으로 믿음으로 새 역사를 쓰는 것은 일류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늘을 무사히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사하지 못한 가운데서 믿음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둔 그 연약함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 하나의 놀라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보며 우리가 배워야할 두번째 교훈은 바로 회개입니다. 혹자는 회개를 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그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것 자체가 그들의 의로움과 충성함을 대변해 줄 수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충성했던 자들은 그들이 가진 믿음에 대한 은혜를 하나님께 빚진 것이므로, 그들의 행위 역시 단순히 율법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율법에 대한 순종보다 회개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를 보면 회개의 중요성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끝가지 회개하지 않아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울왕은 왜 인간이 회개하지 않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넘기셨을 때, 그는 사울에게 모든 것을 진멸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말렉 왕 아각과 가장 좋은 양과 소와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 가치 없고 하찮아 보이는 것은 모두 없앴습니다.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상대방 국가의 왕을 살려두고, 자신의 탐심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눠 좋은 것을 취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사무엘 선지자의 지적에 자신의 행위가 백성들의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고 변명을 하는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렸다고 말하자 사울은 회개처럼 보이는 고백을 합니다. 그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강하게 붙잡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했으나, 자세히 보면 그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 15:30)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 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은 것 처럼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높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선지자에게 위증을 사주하는 것입니다.이처럼 사울은 겉으로는 잘못을 인정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명예와 물질에 대한 탐심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거짓 회개입니다.
오늘날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사울과 비슷한 마음을 품어 제대로 된 회개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채찍을 들어 회개를 요구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먼저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지키는 것이 먼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주된 이유가 자신이 가진 것을 더욱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진 물질의 복을 거두실까 두려워 헌금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진 건강을 취할까 두려워 주일성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자녀의 출세를 가로막을까 두려워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이러한 신앙 생활과 회개는 앞서 본 사울의 것과 매우 흡사한 태도입니다.
반면 진정한 회개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대해 보인 반응을 보면 우리는 회개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 12:13) 사울은 거짓 회개로 하나님께 버림 받았지만, 다윗은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다윗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인지의 여부는 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위력을 이용해 다른 남자의 여인을 강제로 취하는 불법적인 간음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녀의 남편을 계획적으로 살해했습니다. 그러한 범죄는 언제든 다시, 비슷한 형태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류의 범죄를 죽을 때 까지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이가 많아 기력이 쇠하고 아무리 입어도 따뜻하지 않아 그의 신하들이 젊은 처녀를 그의 곁에 두려고 했을 때 조차 다윗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다시말하면, 다윗이 나단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그의 마음 중심에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깊은 미움과 분노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회개를 구분하십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거짓 위증을 부탁하기 전, 사무엘은 그가 버림받았다는 것을 먼저 말했으며, 다윗이 삶으로 자신의 회개를 증명하지 못했을 때 조차도 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용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회개를 흉내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을 미워하되 잠깐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워하십시오. 앞으로 되어질 여러분의 모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회개를 기뻐하시며 용서의 은혜와 참 평안을 허락해 줄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고, 회개로 회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