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km의 불순종의 길을 걷더라도 10km의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 정탐을 모두 마치고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합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요단강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건너 길을 떠난 이스라엘이 이제 가나안 땅에 입성하며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수아를 앞세워 요단강 물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그 가운데로 그들이 모두 지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여호수아 3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수 3:7) 이 사건은 40년 전, 모세를 통해 이루었던 놀라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오늘부터 여호수아와 함께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이자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모세와 여호수아라는 인물 구조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쉬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하나님께 처음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의 여호수아까지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셨고,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은 모세가 한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요단강 물이 갈라진 것 역시 여호수아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행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때 나를 도와주던 누가 있었기 때문에, 혹은 그때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인생에서 넘을 수 없는 홍해 바다와 요단강을 건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놀라운 역사를 그 당시의 인물 중심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을 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과거 우리의 모든 삶의 역사와 오늘 예배 자리에 있는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될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있으며, 모든 어려운 순간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지혜와 환경을 마련해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우리의 삶을 자신의 손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앞으로도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허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구원해 내는 역사는 단순히 ‘추억 감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또 다른 순종을 촉구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할례를 받는 일입니다. 할례를 받는 일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적 맥락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며칠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치러야 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성들이 전쟁을 코앞에 두고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차라리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할례를 받았다면, 요단강을 방어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요단강을 건너 적진에 들어간 상태에서 할례를 받았으니, 전쟁의 전략적 측면에서는 이는 자살 행위에 가까운 것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 전쟁을 치를 때, 얼마나 취약한지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야곱의 딸 디나가 등장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겜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정착했습니다. 그때 그의 딸 디나는 가나안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땅의 추장 세겜의 아들이 디나를 끌어들여 못 쓸짓을 저지르고, 후에 그녀를 연모한다는 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해 야곱에게 서로 딸을 주고 받고 함께 살자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때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할례를 받은 민족이므로, 너희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함께 살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사실 이것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이 할례를 받아 무방비 상태가 되었을 때 그들을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세겜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모든 남성 백성들은 의심 없이 할례를 받았고, 사흘째가 되어 통증이 극심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읍을 들어가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남성을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 성읍을 약탈하고, 가축과 재물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단순히 분노였으나, 이것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정의로운 응징을 넘어선 과잉 보복, 집단 학살 및 약탈이라는 세상적 방식을 택했습니다. 야곱은 그들의 잘못을 끝까지 기억하여 생의 마지막에 그의 자녀를 축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 7) 지금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은 자신들과 과거 가나안 땅에서 할례를 받아 전쟁에서 어떠한 손쓸 도리 없이 멸망을 당한 세겜 백성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내 앞에 있는 적군이 쳐들어올 때,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고, 무기는커녕 자신의 몸조차 가눌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례를 받습니다. 과거 세겜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모르고 할례를 받았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을 시작하는 동시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결국 이 할례는 과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이스라엘의 믿음을 고무시키고 마음에 용기를 북돋아 주신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가장 먼저 건넌 뒤 그들에게 믿음의 할례를 요청했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믿음을 소유하고 묵상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위로, 순종으로 나타낼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믿음의 할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순간, 하나님께서 내가 들고 있는 무기를 모두 버리라 명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것과 앞으로 기대하는 나의 삶에 대한 전망에 취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는 하나님의 기적은 취하고 전장에서 할례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전쟁을 치렀다면, 과연 그들에게 여리고성 함락이라는 역사적 승리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십니다. 승리의 비결은 우리의 준비와 전략이 아니라, 언약에 붙잡힌 정체성에 있다고 말입니다.
할례를 마친 이스라엘 백성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들이 벌이는 전쟁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일주일 동안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도는데, 7일째 되는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을 도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행진하는 순서는 무장한 군사 앞장 서고 후에 나팔 부는 제사장들과 언약궤가 서고 그 뒤에 다시 무장한 군사가 서는 형태였습니다. 이는 전쟁 대형이라기보다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모여 기도하는 예배 형태와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러한 전쟁 방식을 그대로 순종해야 했는데, 그 기간은 7일, 즉 모든 백성이 7일이라는 기간 동안 누구도 불만하거나 원망하는 일 없이 순종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일을 진행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침묵’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수 6:10) 여리고성을 돌며 그들이 지킨 7일간의 침묵은 광야에서 그들이 입술로 저지른 범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먹는 문제로, 피곤함의 문제로, 그리고 정탐꾼의 악평 및 원망, 불평 등으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여리고성을 도는 그 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침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입이 7일 동안 가려진 것처럼, 신약에서는 3일 동안 눈이 가려진 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음성을 들었을 때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나니아의 집에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에서 즉시 바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그의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울에게 앞을 보지 않는 시간,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3일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주어 잠잠히 기도하게 한 것입니다. 누구보다 열심을 내고 쉬지 않고 살아왔던 바울은 그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이 지금까지 쫓았던 삶이 헛것이었고, 자신의 열심과 자부심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잡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보이며 자신을 회개하고 낮추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식음을 전폐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고통이 그의 마음에 3일 동안 사무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즉각적으로 함락시킨 줄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바울이 즉각적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줄 압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모두 7일이라는 시간과 3일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그 사이에 그들은 그들의 입과 눈을 가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주옥같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점령한 이스라엘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통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전쟁의 전략을 내려놓게 하셨으며, 7일의 침묵을 통해 자신들이 광야에서 행한 모든 죄를 속죄하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즉, 요단강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애굽에서부터 요단강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에굽에서 여리고 부근까지의 거리는 약 500km 안밖입니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여리고성까지의 거리는 약 10km 입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이 500km 거리를 걸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그들은 수많은 불만과 원망을 입술로 내뱉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고, 결국 모세를 포함한 광야 1세대는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까지 약 10km,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에서 그들은 40년 동안 그들이 저지른 실수와 범죄를 회개하고 그들의 경험과 무기를 모두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둔 이스라엘은 이 여정에서 실패하지 않았고, 이는 결국 그들의 10km 순종이 결국 500km의 불순종을 이기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이스라엘의 죄를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담당해 그 모든 죄를 없애 준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부족함과 실수도 결국 우리 앞에 놓인 10km의 짧은 거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은사로 주시고 말씀의 기쁨을 허락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할례를 받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모습을 증거하는 시간이 곧 온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짧은 10km를 올바르게 순종하여 지나간 500km의 불순종과 실수를 만회하여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써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