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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잉하라 Feb 14. 2023

01.현실이 가장 빡 센 나이, 43, 39, 9!

1. 평범하지 않은 도전의 시작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나의 스무 살.

재수하고 들어간 대학이어서 더욱 설레고, 행복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 4학년 말, IMF가 터져서 졸업여행도 취소되고 겨우 졸업만 했다. 당시에는 벤처 붐으로 IT 개발자가 많이 필요했고, 억대 연봉의 개발자들이 속출했다. 벤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잘 나갔다. 나도 6개월 넘게 교육받고 JAVA라는 IT 개발 언어를 배워서 개발자가 되었다. 새로운 것을 배워 야근과 밤샘 근무했지만 보람 또한 느꼈다. 젊었기에 밤새고 다음 날 또 일하고 그렇게 계속 몇일을 일해도 할 만했다.


그때는 정부에서 대기업이 주관하여 장기간 투입되는 시스템 사업이 많았고, 이런 장기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안정적인 고용이 가능했다. 나도 정부에서 추진하는 시스템 사업에 투입되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고 경력도 계속 쌓았다.     


그러면서 20대 후반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출산 후 내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육아로 인해 야근, 밤샘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시부모님 댁 옆으로 이사하게 되어 아이를 맡기고 출퇴근하며 일해야 했다. 그러나 연로하신 시부모님은 계속 아이를 봐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다니는 직장 근처로 또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아이는 2살. 출근할 때 회사 근처 어린이집에 맡기고, 퇴근할 때 아이 데리고 집에 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아이와 함께 출퇴근하는 것은 정말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나의 30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다 끝날 것 같았다. 남편도 나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일만 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근과 밤샘 근무로 지친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나도 힘들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남편은 결국 ‘번아웃’이 온 것이다.

그때 남편 43살, 나는 39살, 딸아이 9살이었다.     


남편은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해가는 사람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너무 놀랐다.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서 겪게 되는 여러 고충으로 힘들었나 보다.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고, 위에서는 실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속 새로운 개발 트렌드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 부분도 죽을 맛이라고 했다. 나도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면서 지쳐 있던 상황이었고, 남편이 쉬면서 육아를 맡아 주면 맘 편히 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난 시스템 유지보수팀에 있었기에 비교적 근무시간이 일정해서 남편이 먼저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우리의 평범하지 않은 도전기는 시작되었다.



2. 결코 만만하지 않은 현실


남편은 퇴사 후에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냈고, 단둘이 몇 주간 제주도 여행도 했다. 여러 곳에 여행도 하고, 캠핑도 다닐 수 있었다. 남편은 지금도 그때 퇴사하고 아이와 같이 여행 다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아이 또한 아빠와 같이 다닌 여행을 추억하곤 한다.     

이 시기에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대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쉬면서 제주도로 이주할 생각도 하며 제주도 학교도 알아보고 집도 알아보았다. 그러나 제주도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먹고살 것이 있어야 했기에 우선 제주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남편은 커피 자격증을 따고, 빵에 관한 것도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도 취득했고, 자신감을 얻어 빵 관련 회사에 이력서를 100개 정도 뿌렸다. 그러나 경험이 전혀 없는 40대 남자를 어디서 뽑아주나? 그래도 계속 이력서를 넣었고, 한 군데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그날 아침부터 들뜨고 설레면서 면접 장소로 갔다.


그러나 거기에서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당신 같은 사람 뽑아 줄 빵집 없다. 이력서 보고 너무 안타까워서 보자고 했다.”

남편은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가 생겨 계속 이력서를 내고 도전해보았지만 정말 한 곳에서도 뽑아주지 않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쉽지 않구나, 경험도 없는 나이 많은 초보를 누가 써줄까 하는 생각에 너무 막막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연습하고, 더 많이 배워서 그것을 실습할 수 있는 작은 빵 공방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무조건 '권리금 없고, 저렴한 임대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작업실 자리를 찾아다녔다. 고생 끝에 찾은 곳은 부암동 넘어 신영동이라는 작은 동네에 월세 30만 원인 7평 정도 하는 공간이었다.      

2016년 서울의 시골 동네 신영동에 작은 빵 작업실을 오픈했다. 그곳은 바로 옆에 초등학교 앞에 멋진 은행나무가 있고, 기와지붕으로 된 정말 허름한 건물이었다. 그래도 페인트, 바닥, 조명 등 모든 것을 우리가 다 해가며 남편과 나, 딸의 첫 번째 공간을 만들었다.     

우리만의 첫 공간을 마련하다

신영동의 작은 빵 공방 잭 브래드.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 그 공간의 시작이었다. 여기에서 2년 정도 배우고 만들고 팔고. 이 동네는 서울이지만 정말 시골 같은 분위기다. 손님들도 너무 좋고, 특히 초등학교 앞이라 아이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손님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빵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마들렌 100개씩 보내시던 어머니 손님.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빵집이라고 선결제하고 아이들 대놓고 먹게 하셨던 엄마들.

할머니가 저희 바게트를 제일 좋아한다고 매일 저녁 바게트 사 가시던 아들 손님.

외국인 남편이 이 집 제대로 만든다고 매번 빵을 거의 쓸어 담아 가시던 VVIP 크리스탈 어머니.

어린 제 딸과 재미있게 놀아주던 초등학교 언니.

매일 잭 아저씨 하며 놀러 오던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

점심에 저희 잡곡빵 먹고 들어가시던 방과 후 선생님.

모닝빵 사랑해 주신 직장 남성분.

지금도 그곳에서의 손님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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