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을 눌렀다. 집에 있을 시간이 아니기는 하지만 혹시나 해 눌러보았는데 안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띡. 띡. 띡. 띡”
비밀번호를 바꾼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직이었다. 다행이다. 아침에 출근을 서둘러야 했는지 식탁 위엔 반쯤 먹다 남은 빵 조각과 미처 다 못 마신 믹스커피가 남아 있었다. 예전엔 편안하게 생각되던 이 적막감이 오늘따라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아직 여유는 있지만 서둘러야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바빴다. 어디에 뒀을까? 일단 눈이 닿는 곳부터 살펴본다. 거실 책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낱 장의 종이들이 마구잡이로 꽂혀있는 파일 박스에 시선이 멈추었다. 몇 장 넘겨보니 고지서들이다. 가스비, 주민세, 상하수도 고지서까지 몇 년 치가 마구잡이로 꽂혀 있었다. 간간이 얄팍한 종이로 만든 이런 저런 제품의 사용설명서와 제품 보증서 같은 것들도 들어있었다. 파일 박스는 제 자리에 꽂아두고 책 사이 삐죽 튀어나온 종잇장을 뽑아보았다. 고무자석이 붙어있는 치킨집 메뉴판. 테이프로 쿠폰 한 장이 메뉴판에 붙어있었다. 배달 왔을 때 붙어있던 치킨집 메뉴판이 마침 곁에 두었던 책에 붙어 딸려온 듯 했다. 다시 그 자리에 잘 끼워둔다. 처음 봤을 때처럼 딱 눈에 뛸 만큼 꽂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빠르게 책장을 다시 훑어보았다. 어! 이 책이 여기 있었다. 세상에 빌려간 게 언젠데 그렇게 소식도 없더니.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네. 마음 같아선 지금 챙겨가고 싶지만 더 바쁜 일이 있다. 책장 제일 아래 칸 서류 봉투 두, 세 개가 보였다. 낡은 서류봉투는 배가 불룩했다. 봉투를 하나 꺼내 열어본다. 오래된 사진들이다. 낯익은 얼굴들의 낯선 젊음들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낯익은 사람, 모르는 사람, 지금은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빛바랜 흑백 사진들이 마구 섞여 있었다. 한 장 두 장 넘겨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그 오래된 풍경으로 빠져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나는 보던 사진들을 봉투에 넣으려다 다시 꺼냈다. 봉투를 꺼냈을 때 사진들이 이렇게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진들을 바닥에 흩어놓고 성글게 모아 들었다. 제각각으로 뭉쳐진 사진들을 모서리가 구겨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봉투에 조심조심 담았다. 사진을 다 담고 탁자에 한 번 탁! 치고는 들여다보니 왠지 자연스러워 보인다. 서류 봉투를 제자리에 꽂고 다음 봉투를 꺼내어 열어보았다. 역시 사진이었다. 이번엔 빛바랜 컬러 사진들이다. 한 눈에 보아도 어린 시절의 나였다. 왜소한 팔다리로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머리엔 커다란 꽃이 주렁주렁 달린 수영 모자를 쓰고 있었다. 수영 모자의 꽃들은 물에 젖어 축 처져 있었고 어린 몸에 맞지 않는 무겁고 커다란 튜브는 패인 모래 바닥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퉁퉁 부은 커다란 눈은 방금 울고 난 흔적이 역력했다. 콧구멍에 콧물방울까지 방울당울 달린 것을 보니 방금 물에서 건져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궁금했지만 다시 넣었다. 다음 서류봉투는 책꽂이에 꽂인 채로 살짝 당겨보았다. 역시나 사진. ‘대체 왜 사진을 앨범에 안 넣고 이렇게 두는 거야?’ 나는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거실 탁자 아래 칸에 종이뭉치들이 있다. 이렇게 손닿기 쉬운 곳에 있지는 않겠지만 일단 쥐고 대강 넘겨본다. 손뜨개 도안들이다. 여러 가지 도안 중엔 내가 선물 받은 손가방의 도안도 있었다. 다시 놓여있던 그대로 올려둔다. 아무래도 거실에는 없는 것 같다.
작은 방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멀리 사는 아들 내외가 자고 갈 때나 쓰는 작은 방엔 이부자리 말고 아무것도 없다. 안방으로 갔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침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옷장과 이불장, 그리고 화장대. 옷장이나 이불장은 설마 아니겠지 하며 화장대를 뒤져본다. 작은 서랍엔 오래된 립스틱과 립 그로스, 파운데이션, 자잘한 화장품 샘플들이 들어있었다. 얼굴이 칙칙해 보인다고 불평하면서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BB크림과 비싼 거라고 벌벌 떨며 딱 콩알만큼만 찍어 바르는 영양크림도 있었다. 다른 서랍에는 작은 크기의 부분 가발들이 있다. 나이를 먹으니 머리가 많이 빠진다고 하며 이런 부분 가발로 버티어보다 결국 얼마 전 정수리를 덮을 정도의 가발을 장만했다. 화장대에 달린 벽장을 열어보았다. 양말상자, 화장품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저 화장품 상자 가운데 하나가 반짇고리함인 걸 아는 나는 겉보기에 속지 않는다. 상자들을 순서 그대로 한꺼번에 꺼내어 하나하나 확인한다. 제일 아래 있던 상자는 화장품세트가 맞다. 이건 작년에 내가 선물한 것인데 아직 쓰던 게 남아서 안 쓰고 있는 거라고 하더니 샘플은 화장대 위에 버젓이 올라가 있다. 역시 이것도 아끼느라 못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위에 있던 화장품 상자는 반짇고리함이다. 언젠가 선물 받은 이 화장품 상자를 보고는 비싼 화장품은 곽도 다르다며 좋아했었다. 그러고는 잠시 뒤에 ‘차라리 좀 헐게 만들고 싸게 팔지.’ 하고 구시렁거리며 집안들 둘러보더니 녹슨 쿠키통의 반짇고리들을 옮겨 담았더랬다. 그게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니, 화장품보다는 이 상자로 본전을 뽑았다고 해도 틀린 얘기가 아닐 것이다. 그 위에 있던 양말 상자엔 등기부 등본이 있었다. 집과 관련한 여러 서류가 함께 들었는데 그것도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터벅 터벅 터벅’
현관 쪽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옆집 아이가 뭘 잘못해서 벌을 서는지 다 들릴 정도로 방음이 엉망인 이 집이 늘 불만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다행이다 싶었다. 난 서둘러 순서대로 열어보던 상자를 화장대 장에 그대로 넣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에 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을까? 부엌에 가 있는 게 나을까?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발자국 소리는 끝나고 ‘띠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앞집 현관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짜증스런 마음으로 다시 안방으로 가 아까 미처 열어보지 못한 상자들을 꺼냈다. 새 양말 상자가 두 개에 스킨로션세트 한 상자. 들어보기만 해도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는 화장품 상자에는 머리를 마는 세팅기 롤이 들어있었다. 상자들을 다시 화장대 장에 넣어두고 나는 잠시 침대에 걸터 앉았다. ‘이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하며 왜 갑자기 여기에 와야 했는지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어버이날이었다. 중학교 2학년 딸과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둔 나는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와의 신경전으로 매일이 전쟁이었다. 양말이 없네~ 이 양말이 아니네~ 용돈이 적네~ 자퇴를 하고 싶네~ 있는 소리 없는 소리로 사람 속을 뒤집는 딸아이와는 원수가 된 지 오래였다. 대체 넌 누굴 닮아서 사람 속을 이렇게 뒤집냐며 소리 지르는 나와 냉랭한 얼굴로 ‘누군 것 같애?’ 하고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아이를 볼 때면 나는 하루에 열 두번이라도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은 어버이날, 하교 후 집에 돌아온 작은 아이는 쑥스럽게 웃으며 ‘엄마~’하고 편지 봉투와 학교에서 만든 카네이션을 내밀었다. 글씨는 엉망진창에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사랑해요만 다섯 번 쓴 것 같은 빈약한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이 뿌듯한 것이, 부모된 보람이 따로 있나 싶어 가슴이 찡 울려왔다. 3시쯤 딸아이가 왔다. 오늘 아침에도 자기가 찾는 머리핀이 없다고 세상 짜증은 혼자 다 내고 나갔던 딸이다. 나도 미운 마음이 들어 들어온 아이에게 인사도 않고 냉랭한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분홍빛 편지봉투를 슬그머니 식탁에 올려놓고는 학원 다녀오겠다며 나가는 게 아닌가? 난 그런 아이를 보고 ‘에이그, 그래도 컸다고 어버이 날인 건 아나 보네.’ 하며 먹먹한 마음으로 편지를 꺼냈다.
‘형은 A지점부터 P지점을 지나 B지점까지 가는데 P지점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P지점부터는 걸어서 갔다. 동생은 거꾸로 B지점부터 P지점을 지나 A지점까지 가는데 P지점 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P지점부터는 걸어서 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출발하여 30분 후에 만났고, 형이 동생보다 12분 일찍 도착했다. 두 사람 모두 자전거의 속력을 분속 450m, 걷는 속력을 분속 150m를 유지했다면… ’
이게 뭐야???? 이 녀석은 약 올리듯 또박또박한 글씨로 예쁜 편지지에 이렇게 수학문제를 베껴놓았다. 그 아래는 이렇게 써있었다.
“학교에서 다 같이 편지 쓰는 시간이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쓰는 거야. 내가 엄마한테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엄마는 내가 하겠다는 건 다 안된다고만 하잖아. 내가 엄마라면 딸한테 이렇게는 안할 것 같애. 정말 짜증난다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처음엔 기가 막혀서 ‘하!’, ‘참나’, ‘야~ 진짜’ 하며 더 말을 이을 수가 없더니 점점 화가 났다. ‘아니 이게 근데 제 정신이야?’, ‘대체 뭐가 되려고 저러는 거야?’ 머리 꼭대기로 화가 점점 몰리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부엌과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이 기막힌 마음을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가 몇 번가다 끊기는 걸 보니 바쁜 모양이었다. 폭풍같은 화가 지나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딸아이의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물색 모르게 고운 편지지의 분홍 색감에 더욱 서러워졌다. ‘나쁜 년, 내가 지를 얼마나 위했는데 이런 소리를 해? 진짜 딱 저 같은 딸 낳아서 이 고생을 해봐야 하는데… 진짜 어디서 저런 애가 나왔지? 나는 엄마한테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바로 그때 퍼뜩 생각이 났다. 오랜 시간 수없이 보면서도 궁금하지도 않았던 옷장 속 상자 하나. 나는 망설임 없이 안방의 옷장을 열어 손닿기 힘든 제일 윗 선반에 놓인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마자 ‘여기다’ 싶었다. 그 상자 안엔 나와 우리 삼 남매의 성적표와 상장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종이 카네이션, 학교에서 몇 천원에 공동구매한 카네이션 조화와 편지, 카드들이 들어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더 자세한 기억이 떠올랐다. 가장 두꺼운 종이. 그때 편지지도 없어서 스케치북을 찢어 편지지를 만든다고 색볼펜으로 이런 저런 그림도 그렸었다. 잡히는 대로 넘겨보니 유독 두꺼운 봉투 하나가 잡혔다. 이거였다. 여섯 칸짜리 우편번호가 그려진 오래된 규격봉투 안에 두꺼운 스케치북 종이는 펴보지 않아도 바로 이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상자를 닫고 제 자리에 올려두었다. 놓여있던 각도까지 처음처럼 돌려놓고는 편지 봉투를 들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삼단으로 접혀있던 종이를 펼치자마자 낯익은 볼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악필인 글씨. 그리고 그 중간쯤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난 엄마처럼은 안 살 거야!!!’
나쁜 년, 누가 누구보고 나쁜 년이래. 누가봐도 니 딸이구만… 실소가 나왔다.
“띡. 띡. 띡. 띡”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들고 있던 편지를 숨길 데가 없었다. 급히 화장대 위에 있던 화분과 화분 받침 사이에 끼워 넣었다.
“띠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난 손을 털며 일어났다.
“엄마~”
“어~ 너 와있었구나~ 오래 기다렸어? 갑자기 어쩐일이야~”
“금방 왔어, 금방. 동네 빵집이 새로 열었는데 팥빵을 잘하더라고~ 엄마 단팥빵 좋아하잖아.”
나는 자연스레 엄마와 부엌으로 가 핑계 구실로 사 온 단팥빵을 꺼내 보였다.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 신경은 온통 화분에 깔아둔 편지에 가 있었다.
“엄마, 근데 안방에 보스톤고사리 엄청 잘 키웠더라?”
“그래? 그거야 뭐 지가 크지, 내가 키웠나? 그냥 잘 크던데?”
“나 벌써 두 번이나 죽였는데도 너무 이쁘더라고~ 그거 내가 가져가면 안돼?”
“갖고 가~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대신 다음에 화훼단지 갈 때 나 데리고 가. 알았지?“
나는 시침 뚝 떼고 엄마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봄 가뭄 이야기, 다가올 여름 이야기, 친척들 안부까지 두루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나는 슬그머니 엉덩이를 떼었다. 그러고는 안방으로 가서 편지를 숨긴 보스톤고사리를 화분 받침째로 들고 나왔다.
“화분 받침에 물 없어? 물 준지 며칠 안됐는데…”
“응, 없어, 없어. 괜찮아요.”
이야기를 나눌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화분을 손에 쥐니 조급증이 났다. 서둘러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서연 아빠한테 잘해. 그만한 남편도 없어~” 평소 같았으면 꼭 한 마디를 보탰을 나지만 오늘만은 마음이 급해서, 또 찔려서 그냥 넘어간다.
“응, 잘 해~ 잘 한다고~ 나 갈께요~”
“그래, 안 내려간다~ 조심해 가~”
무성한 이파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온 나는 차 문을 열고 보조석에 보스톤고사리를 앉혔다. 흔들리다 흙이 쏟아지지 않도록, 무성한 이파리가 접히지 않도록 조심스레 벨트까지 잘 채우고서는 운전석에 앉았다. 그제서야 큰 한 숨이 나왔다. 화분 귀퉁이만 살짝 들춰 편지가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걸 어쩌나?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혹시나 엄마가 내려다보고 있을까 싶어 일단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잘~ 하는 짓이다. 넌 대체 언제 철이 들래?’ 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괜시리 곁눈질로 옆자리 화분을 째려보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집에 가서 주차할 때까지는 정신 차려야 돼! 혹시나 지금 집에 가다 사고라도 나면 이걸 누가 볼 수도 있다구!’ 나는 잔뜩 긴장해서는 신호등도 세 번씩 확인해가며 집으로 돌아왔다. 주차장에 차를 잘 대놓고는 떨리는 손으로 흙물에 살짝 젖은 편지를 다시 열어 보았다. 세상에… 뉘 집 딸이 이렇게 괘씸한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누가 볼까 후다닥 접었다가 다시 빠끔히 열어본다. 제대로 읽어볼 생각도 못하고 눈길 닿는 몇 줄만 보았는데도 얼굴에 열이 확 오른다. 암만 생각해도 이걸로 엄마한테 혼난 기억이 없다.
‘세상에… 엄마도 엄마야. 이런 걸 들고 온 딸내미를 그냥 뒀단 말이야? 어휴……’
얼굴에 오른 열이 눈가로 모였다. 나는 편지를 손에 쥐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시 뒤에 눈을 뜬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잘게 찢었다. 찢긴 종이 사이로 낯익은 글자들이 엿보였지만 애써 외면하고 더 자잘하게 찢었다. 종잇조각들을 가방안 의 작은 주머니에 대충 우겨넣고 나는 한참을 더 가만 있다가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어, 오늘 언제 들어와? 모처럼 애들 데리고 외식이나 하자구. 서연이 사춘기라 나랑 사이도 요즘 별로 안좋았는데 서연이 좋아하는 거 먹자. 내가 언제 화를 냈다 그래~ 그냥 서운해서 그랬지. 생각해보니까, 걔가 나를 닮았더라고~ 어쩌겠어~ 그래, 당신 안 닮고 나 닮았어~ 응, 조심해와요.”
전화를 끊고 옆자리에 있던 화분을 잘 갈무리해 양손으로 안아 들었다.
‘다음 주에 엄마랑 같이 화훼단지가서 완전 멋진 걸로 사 드려야지!!’
무성한 고사리잎이 코끝을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