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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 07. 2022

허상을 재현하는 실존의 문장

'상아의 문으로', 구병모

<상아의 문으로>, 구병모, 문학과지성사(2021).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

―현실의 재현을 넘어,

불확실과 불분명을 재현해내다     


구병모는 ‘쓰기’라는 행위를 치열하고 끈질기게 고민해온 작가이다. 국어사전 속 낯선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간단명료한 문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해왔다. 생소한 단어와 문장으로 현실의 너머를, 때로는 현실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찔러온 구병모는 마침내 소설 『상아의 문으로』를 통해 현실 안팎의 경계를 허물어낸다. 현실과 꿈을 혼몽하는 인물과 집요한 문장을 통해 그는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를 말할 수 있습니까?” 입을 열어 대답하는 순간 독자는 꿈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꿈을 꾸었다고도, 꿈에서 깨었다고도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이곳은 이미 상아의 문 안이므로.


어느 날 이상한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침대 위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꿈을 꾼다. 꿈의 비현실적인 속성을 갖춘 “일련의 도약과 부유와 결락”이 무차별적으로 일상을 습격한다. ‘진여’는 주변이 실시간으로 변화하거나 기묘한 인물들과 비논리적 사건이 출몰하는 삶을 살아간다. 진여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스스로의 존재를 확신하기 어려운 만큼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도 장담할 수가 없다.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병원과 클리닉, 강좌 등을 다니던 진여는 꿈과 관련된 강의를 하는 강사 ‘무기’를 만나게 된다. 무기는 자신이 진여를 도울 수 있는 ‘드림 피스 메이커’라고 밝히는데……. 그러나 아무도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다. 무기의 말은 꿈속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여와 무기가 만났다는 문장마저도, 혹은 그 이상의 것들도.


『상아의 문으로』라는 제목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유래되었다. 구병모는 ‘상아의 문’으로 흘러든 꿈은 거짓된 것이며, 오직 진실된 것들만이 ‘뿔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서사시 속 소재를 현실에 부려놓는다. 책을 펼쳐 상아의 문으로 들어선 독자들은 모든 사건과 문장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이야기의 진실이나 숨겨진 비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상아의 문으로』에 있는 것은 ‘거짓의 진실’, ‘없음의 있음’이 발하는 순간적인 반짝임이다. 꿈의 논리로는 현실을 찾을 수 없고 현실의 논리로는 꿈을 찾을 수 없다. 꿈과 현실을 분간하는 것이 의미 없음을 증언하는 문장은 의미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의미 없음에 가까워져야 한다.


‘이야기로 서술될 수 없는 이야기’는 구병모가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모색해온 지점이다. 작가는 2018년 출간한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의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이제는 이야기의 너머에 또는 기저에 닿고 싶어진 것이다. 현전의 재현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잡히지 않는 것을 만질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올까.” 몇 달 후 문예지 『계간 문학동네 통권 98호』의 지면에서는 “영혼5는 어떤 수를 써서든 문장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야 한다. 만질 수 있고 삼킬 수 있는 실체를 입혀야 한다. 그것이 지옥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조금 아이러니하다.”는 문장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잡히지 않는 것을 만’지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 있다.


작가는 이야기와 생각을 글에 담아내는 사람이다. 글의 내용인 이야기와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만질 수도 삼킬 수도 없다. 형체 없는 내용은 글자와 매체에 담겨 비로소 형체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작가의 유일한 수단이자 무기인 글마저도 분명한 형체를 갖추고 있지는 않다. 글자와 매체로 글을 완전히 붙잡아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문장이 막 쓰인 자리에서, 그것이 표현하고자 했던 대상은 탈주를 시작”한다. 문예지에 실린 구병모의 글은 결국 “문장을 적게 쓸수록 불의의 사태가 발생할 확률이 줄어든다. 그러니 어떤 문장도 쓰지 않는 것이 모든 오독을 원천 차단하는 길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럼에도 작가는 정답을 알면서도 그 길로는 갈 수가 없는데,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므로 스스로가 내린 결론을 본질적으로 위반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병모는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법의 빵,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의 식물로 변해버린 사람들, 『버드 스트라이크』의 날개 달린 ‘익인’, 『바늘과 가죽의 시』의 구두장이 요정 등 ‘현실 속 비현실’을 다루는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이제 작가는 한발 나아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이야기로 서술될 수 없는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상아의 문으로』는 이해의 불가능성과 서술의 불분명함으로 지어진 미로를 유려하게 유영한다. ‘상아의 문’에 들어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명료하다는 사실뿐이다.


『상아의 문으로』 마지막 장에는 추천사가 실려 있다. 이장욱 소설가의 추천사는 구병모의 등단작 『위저드 베이커리』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최신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의 작품으로 돌아가는 것, 이를 통해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작품 세계의 눈부신 확장을 증언한다. 『상아의 문으로』에는 작가가 그동안 목표해온 주제와 문장, 시선이 층층이 쌓여있다. 글 속의 모든 문장과 사건 들이 거짓만이 담겨있는 ‘상아의 문’에 머무르는 가운데, 구병모의 견고한 세계는 진실만이 통과할 수 있는 ‘뿔의 문’ 너머로 곧게 뻗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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