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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 22. 2023

슬픔을 향유하는 기쁨,
위로를 잊은 비극

'비극', 테리 이글턴, 서평단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비극>, 테리 이글턴, 정영목 옮김, 을유(2023).

슬픔을 향유하는 기쁨


"비극은 죽었는가."


테리 이글턴의 문학 비평 <비극>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비극을 단순히 '슬픈 이야기'로 본다면, 비극은 죽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숱한 영화와 드라마가 '누가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슬픈 장면을 내보내고 있다. 예능 또한 마찬가지다. 유행어를 지나 일종의 관용어가 되어버린 '눈물 버튼'이라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다. 눈물 버튼은 누군가가 '누르면 눈물이 나오는'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듯 겉잡을 수 없이, 그리고 아주 쉽게 눈물이 흘러나온다는 뜻의 단어다.


예능 속 슬픈 장면들만 모아 편집한 유튜브 클립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슬픔은 환영받고 사랑받는다. 비극이 죽었는지는 몰라도, '슬픔을 향유하는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직 굳건하게 존재하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의 하루가 슬프지 않기를 바라면서, 슬픈 이야기들은 일부러 찾아보는 걸까?


소설가 박서련은 에세이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 걱정을 자연스럽게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할 게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박서련,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작가정신(2021), 37쪽.)


세계나 국가의 존망이 달린 거대한 슬픔을 만끽하다보면, 개인의 슬픔과 사소한 불행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데에서 위로를 받는 걸까?


시인 헤더 크리스탈은 눈물에 관한 논픽션 <더 크라잉 북>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3년에 발표된 '쾌락적 전도' 혹은 '무해한 마조히즘'에 관한 연구는 매운 음식이나 역겨운 농담, 슬픈 음악 등이 (...) 쾌락이 되는 과정을 다룬다.
(헤더 크리스탈, <더 크라잉 북>, 북트리거(2021), 261쪽.)
쾌락적 전도에 관한 연구에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우리가 발견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어떤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슬픈 경험을 하고, 그로 인해 울기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경향성은 여성에게 더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모든 쾌락적 전도 중에서도 슬픔에 대한 애호는 예술 작품과 맞물려 있다. 그만큼 심미적 특질이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슬픔의 기능을 더 잘 알았더라면 이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책, 273쪽.)


우리는 슬픈 예술을 감상하며 슬픔이 아니라, 슬픔 너머의 쾌락을 얻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슬픔을 향유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타인의 슬픔을 만끽하는 즐거움에는 몇 가지 질문과 찜찜함이 따른다. 비극적 작품 속 비극은 현실의 비극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허구의 비극적 사건이라고는 해도 어쨌거나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대한 내용인데, 그것을 이렇게 손쉽게 소비해도 되는 걸까? 그 어떤 비극적 작품 속 비극보다 더 끔찍하고 참담한 일들이 현실에 산재해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철학자 아도르노의 유명한 말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문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비극은 죽었는가"


"비극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극이 무엇인지 정의부터 해야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비극은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테리 이글턴은 비극을 "특정 문명이 아주 짧은 역사적 순간 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갈등과 씨름하는 형식(13쪽)"이 담긴 것이라 정의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리스 고대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에서, 고귀한 혈통의 주인공들은 거대한 운명과 개인의 삶 사이에서 고뇌하며 괴로워한다. 이때 주인공의 운명에는 그가 속한 시대나 국가의 명운이 달려있고, 주인공이 추구하는 가치에는 새 시대의 윤리와 가치관이 담겨있다. 따라서 비극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가 비극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비극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 예술 뿐만 아니라 철학, 정치, 미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친 통찰이 필요하다. 테리 이글턴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등 고대 그리스 비극과 철학부터 시작해 니체, 하이데거, 루카치, 그리고 현대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대를 아우르며 다양한 비극 이론들을 살펴본다.


많은 철학자들이 '비극은 이제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근대로의 이행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요 요소들인 신, 귀족, 운명, 우연 등은 근대의 세속주의, 계몽주의, 개인의 자유 앞에서 고루하고 희미해졌다. 그러나 설사 비극이 예전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고 해도, 비극을 관람하고 향유하는 일에는 아직까지 의미가 있다. 관객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타인의 비극을 관조하며 안도감과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주인공의 의지에 감동받거나 절망적인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읽어내기도 한다. 비극은 사회에 대한 사유를 한발짝 넓혀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위로를 잊은 비극


"비극은 죽었는가" 질문을 던지며 시작된 테리 이글턴의 글은 점점 '비극에 대한 철학을 철학하는 일'로 이어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비극적이다'라는 말은 비극보다 이후에 탄생한 말이다. 그리고 '비극적이다'라는 말과 예술로서의 비극이 추구하는 바는 항상 동일하지만은 않다.


보수적 관점에서 보자면 아이스킬로스는 비극적이지만 아우슈비츠는 그렇지 않다. 홀로코스트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통탄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고양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비극>, 을유(2023), 22쪽.)


그러나 철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들은 아우슈비츠가 비극이 아니라는 말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무엇이 진정한 비극인지' 올바른 형식에 대해서만 철학하는 일은 자칫 '슬픔을 어떻게 예우하고 애도해야 하는지'를 놓쳐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궁극적 비극은 우리가 인간적 가치에 너무 무관심한 나머지 더는 애도도 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같은 책, 33쪽.)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이 이데올로기는 결국은 복구가 불가능한 곤경을 맞이한 사람, 결국은 대립물의 통일로 환원될 수 없는 갈등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다. 그것은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
 (같은 책, 248쪽.)


그리하여 테리 이글턴은 "비극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비극의 존폐를 따지기에 앞서, 비극이 비극이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길어 올린다.


비극의 주인공은 신과 영웅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 "거리에서 뽑혀나와 한계까지 내몰린 누구라도 될 수 있(148쪽)"으며, 어떤 사건이 비극이 아니라 그저 '비극적인 일'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것이 슬프지 않은 일이 될 수는 없다. 비극의 죽음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한 비극인지' 따지느라 실재하는 슬픔에 무관심해지는 일이야말로 궁극적인 비극이 될 것이다. 


짧은 식견으로는 책 속에 언급된 모든 철학자와 극작품 들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다. 검색의 도움을 자주 받았고, 몇 번이고 읽고서도 결국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이해만으로도, 테리 이글턴의 쌉싸름한 통찰과 원숙한 식견이 담긴 이 책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서 반복해 읽고 공부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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