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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09. 2023

과학과 상징
―두 차원의 진실이 공존하는 SF

'사랑에 빠진 레이철', 팻 머피, 동아시아 서포터즈 

《사랑에 빠진 레이철》, 팻 머피, 허블(2023).

‘과학적’이라는 단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하고 확고한 진리를 가리킨다. 자연스럽게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근거 없이 허무맹랑하고 거짓된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어쩌면 몇몇 SF소설이 “이 작품은 SF소설답지 않다”라는 평을 듣는 데에도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엄중하고 객관적인 진리에 기반해야 마땅한 사이언스 픽션이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때로는 판타지적인 요소들까지 담아내는 모습이 ‘과학적’이라는 표현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는 우주의 티끌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잠정적 참으로 인정되는 사실 설명이다. 창조론은 사실 설명이 아닌 상징 해명이다. 이른바 ‘진화론’과 부딪히는 지점이 전혀 없다.”
 
―《숨은 신을 찾아서》, 강유원, 라티오, 43쪽.



과학적인 시선에서 보았을 때 신화는 당연히 거짓이다. 신의 존재와 이적異蹟, 행적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기가 어렵다. 하지만 신화학자나 정신분석학자 들은 신화가 진실이라고 말한다. 신화 속 사건들이 정말로 현실에서 일어난 적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을지언정 사람들의 심리나 내면세계 속에서는 상징적인 진실로서 기능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철학자 강유원은 진화론과 창조론이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실 설명’과 ‘상징 해명’으로서 공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이 ‘과학적인 사실로서 진실인 것’과 ‘신화적인 상징으로서 진실인 것’으로서 공존 가능하다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과학―상징이라는 두 차원의 진실을 함께 누릴 수 있다.


팻 머피의 SF소설집 《사랑에 빠진 레이철》은 과학―상징이라는 두 차원의 진실이 혼재하거나 공존하는 장면들을 다수 보여준다. <도시 빈민가의 재활용 전략> 속 주인공 ‘나’는 담당 사회복지사의 조언을 무시하며, 길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주워와 비좁은 호텔방 안을 가득 채우는 사람이다. 동시에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우주선의 파편을 찾아내고, 정부가 숨기려고 하는 외계인의 비밀을 눈치 챈 사람이기도 하다. <안녕, 신시아> 속 등장인물 ‘신시아’는 어머니에게는 오래전 실종된 딸이지만, ‘나’에게는 우주선을 타고 여행 중인 언니다. <뼈>의 주인공 찰리 번은 2.5미터가 넘는 거구의 소유자다. 찰리는 자신이 아일랜드의 거인 왕 브랜 대왕의 핏줄이기 때문에 커다란 몸집을 갖고 있다고 믿지만, 찰리의 사후 인간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뇌하수체가 기형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찰리가 가지고 있던 신비한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과학적인 설명을 찾아내지 못한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과 아무 관련도 없다.” 
― <무척추동물의 사랑과 섹스>, 《사랑에 빠진 레이철》, 팻 머피, 허블, 523쪽.



팻 머피의 SF단편 <무척추동물의 사랑과 섹스>는 과학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파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심지어 이 단편소설의 화자 ‘나’는 생물학과 공학을 전공한 연구원이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을 기다리며 로봇을 만들고, 로봇들에게 성기를 달아준다. “일종의 농담”이었던 이 행위는 곧 생물학이라는 과학이 아니라, 생물의 감정과 욕구에 대한 상징적인 의문으로 전환된다.



“음경은 깔끔하게 질에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로 들어가지? 생물학이 끝나고 고차원적인 감정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지? (……) 교과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추측하지만, 해답을 얻을 길은 없다.” 
― 같은 책, 534쪽.



‘나’의 의문은 감정이 작동하는 과학적인 메커니즘이나 그에 영향을 주는 호르몬을 알고 싶다는 과학적 호기심이 아니다. 교과서나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이, 추측은 할 수 있지만 해답을 얻기는 요원한 분야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에 가깝다.


과학은 분명 아주 많은 질문들에 믿을만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모든 질문들에 답을 하지는 못한다, 혹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을지언정 듣는 이가 원하는 말만 들려주지는 않는다. 과학이 부족하니 신화나 종교에 의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데 ‘과학적’인 방식이 항상 최선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도시 빈민가의 재활용 전략>에서 ‘나’는 논리와 상식으로 자신을 설득하려는 사회복지사를 피해 도망친다. <안녕, 신시아>의 어머니는 신시아가 이미 사망했으리라 여기며, 괴로운 마음에 신시아의 모든 흔적들을 외면한다. 그러나 신시아의 동생 ‘나’는 지금도 신시아가 행복하게 우주를 여행하고 있을 것이라 믿으며 어머니를 위로한다. 그게 옳든 그르든 간에, 때로는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마음속의 진실이 삶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팻 머피의 소설은 환상적인 소재와 모호한 서술을 통해 독자를 과학―상징이라는 두 차원의 갈림길 앞에 데려다놓는다. 독자는 팻 머피의 이야기를 외로운 등장인물이 괴로운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낸, 달콤한 대안적 허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아니면 외로운 등장인물이 마침내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 자신을 위한 세계로 떠났다고 믿을 수도 있다. 팻 머피는 ‘과학적’이라는 말의 한계에 갇히는 대신 과학과 상징을 함께 탐구하며 과학적인 허구, 사이언스 픽션의 세계를 무한대로 확장시킨다.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설명하는 유일한 진리는 없다는 것, 견고해 보이는 현실 아래 또 다른 차원의 삶과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팻 머피가 찾아낸 진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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