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시간이 알려준 것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외로움이 결핍의 감정이라면, 고독은 선택의 결과다.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날, 나는 그 차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아내에게 며칠 혼자 다녀오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이해한다고 말했다. "다녀와. 필요한 시간인 것 같아." 그 말이 고마웠다.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 이름도 생소한 지방 도시였다. 관광지로 유명하지도 않고, 특별한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었다. 중요한 건 그곳이 어디냐가 아니라, 내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에서 내려 작은 게스트하우스로 걸어가는 동안, 가슴 어딘가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섰다. 지도도 보지 않고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골목길이 나오면 들어가고, 모퉁이가 나오면 돌았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어디에 도착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걸었다. 혼자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자유로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낯선 골목은 조용했다.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좁은 길 사이로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빨래가 걸린 창문, 화분이 놓인 문 앞,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이 골목의 사람들은 매일 이 길을 걷고, 이 풍경을 보며 살아가겠지. 나에게는 낯설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인 공간.
그 생각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 도시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다. 직장에서의 직책도, 가정에서의 역할도, 사회적 관계도 모두 벗어던진 채 그저 한 명의 행인일 뿐이었다.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해방감이 들었다.
서울에서의 나는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직장인, 남편, 아들, 친구. 각각의 역할에는 기대와 책임이 따라왔다. 회사에서는 성과를 내야 했고, 집에서는 좋은 남편이어야 했으며, 부모님 앞에서는 든든한 아들이어야 했다. 그 모든 역할을 해내느라 정작 "나"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낯선 골목에서는 그 어떤 역할도 필요 없었다. 나는 그냥 나였다. 이름도, 직업도, 관계도 없는 순수한 나. 그 상태로 걷는 것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고,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작은 카페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손님은 나 혼자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골목길이 보였고, 가끔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도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출근하는 사람, 장을 보러 가는 사람,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모두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일상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혼자 있다는 것은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느라 나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아침에 눈 뜨면 해야 할 일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고, 밤에 잠들 때까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 여행은 그 시간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혼자 걸으며, 혼자 커피를 마시며, 혼자 생각하며. 나는 나를 다시 발견하고 있었다. 역할을 벗어던진 맨얼굴의 나.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나.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나.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카페를 나와 다시 골목을 걸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집집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저녁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풍겨왔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도시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방향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길을 헤매도 괜찮았다. 혼자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았고, 누구를 기다리게 하지도 않았다. 내 속도로, 내가 원하는 대로,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걷고 싶을 때 걸었다. 이런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혼자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가족을 두고 혼자만 떠나는 것이 이기적인 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필요였다. 나를 돌보는 시간, 나를 회복하는 시간. 그래야 다시 돌아가서 더 나은 남편이 되고, 더 나은 아들이 되고, 더 나은 직장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빈 배터리는 충전이 필요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역할을 수행하느라 소진된 나를 충전하는 시간. 그것이 이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샀다. 작은 방에 짐을 풀어놓고 창가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창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서울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소박함이 좋았다. 낯선 도시의 밤은 고요했고, 나는 그 고요함 속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내일은 어디로 갈까. 정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마음 가는 대로 정하면 된다. 계획 없는 여행이 이렇게 자유로울 줄 몰랐다.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일정이 중요했다. 여기는 몇 시에 가고, 저기는 몇 시까지 둘러보고, 점심은 어디서 먹고.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었고, 그 계획대로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혼자 떠난 이 여행에는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좋았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도, 점심을 거르고 걸어도, 하루 종일 카페에만 앉아 있어도 괜찮았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었다. 온전히 내 시간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다시 역으로 가는 길에 어제 걸었던 골목을 지나갔다. 하루 만에 조금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어제 봤던 고양이가 여전히 담벼락 위에 있었고, 어제 들렀던 카페도 문을 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도시는 내게 무언가를 남겼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이 여행이 내게 준 것은 무엇일까. 특별한 경험도,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과 마주한 시간. 역할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시간. 아무도 모르는 골목을 걸으며 나를 다시 발견한 시간.
돌아가면 다시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직장인으로, 남편으로, 아들로. 그 역할들을 다시 입고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가끔은 그 역할들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를 기억하기 위해. 혼자 떠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낯선 골목이 내게 알려준 것은 이것이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는 것. 아니, 혼자 있어야만 볼 수 있는 나 자신이 있다는 것. 그 시간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라는 것.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짐을 들고 내리며 다시 익숙한 도시의 소음이 귀를 채웠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안내 방송이 울리고, 지하철 환승 안내가 보였다. 나는 다시 이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내 안에는 낯선 골목의 고요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도착했어. 곧 집에 갈게."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반가웠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지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도 감사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유와, 돌아갈 수 있는 집. 둘 다 필요한 것들이었다.
낯선 도시의 골목길은 이제 기억 속에 남았다. 언젠가 다시 지칠 때, 역할의 무게가 버거워질 때, 나는 또 혼자 떠날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골목을 걸으며, 나 자신과 마주하며, 역할이 아닌 나로 존재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