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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다해 Feb 25. 2021

여기 사인하셔야 입장 가능합니다.

이게 뭔 줄 알고 사인을 해?

아이가 처음으로 친구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파티장소는 바운스하우스(공기주입하는 큰 미끄럼틀 같은게 많은 놀이시설)였다. 입구에서 직원이 뭔가 깨알 같은 글씨로 엄청나게 많은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를 한 장 주며 사인을 하라고 했다. 여기에 사인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이라 눈에 물음표가 뿅뿅 떠올랐다. 애는 옆에서 얼른 들어가자고 보채고 읽자니 너무 내용이 많았다. 얼른 파티 호스트 엄마에게 SOS를 외쳤다. 이게 뭔지 사인해도 되는 것인지 물었다. 그 엄마는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곤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자기네 고소 하지 말라는거야. 사인하면 돼


아... 아마 이 놀이 시설에서 놀다가 다쳐도 운영자는 책임이 없고, 안전 주의 사항을 모두 전달받았소. 그러니 당신네를 고소하지 않겠소. 자, 여기 내  사인. 이런 정도의 내용인 듯 했다. 그 후로 다른 놀이시설에 갔을 때도 항상 입장 전 이 종이(웨이버waiver라고 부른다)를 제출해야 했다.


소송의 나라, 미국

이렇게 곳곳에서 웨이버를 받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런 웨이버를 받아 놓지 않았다가 누가 다치거나 사고가 나면 사람들이 집단 소송을 걸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가 왕왕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웨이버에 사인을 했어도 서비스 제공자가 충분히 안전조치를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얼마든지 또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고 들었다.


이런 곳 뿐만이 아니다. 쇼핑몰이나 식당, 공공장소에 가면 노란 색 화장실 근처나 걸레질을 한 주변에 미끄럼 주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걸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도 모두 비슷한 이유로 세워져 있다. 이런 경고 표시를 하지 않았다가 누군가 다치거나 피해를 입으면 역시 고소를 할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왜 커피가 이렇게 뜨거워?!? 보상해!!!

1990년대에 개인이 대기업을 고소해 큰 보상을 받은 사건으로 유명한 것이 있다. 한 할머니가 맥도널드 드라이브스루에서 커피를 사서 커피를 둘 자리가 없어 허벅지 사이에 끼고 앉아 있다가 이게 옆으로 넘어지며 다리에 쏟아져 크게 화상을 입었다. 할머니는 맥도널드 측에서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주지 않았고 과도하게 높은 온도로 커피를 제공해 자신이 피해를 입었으니 배상을 하라고 맥도널드에 요구했다. 맥도널드 측에서는 배상을 거절했고,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된 이 사건은 할머니의 승소로 끝나 처음에 요구했던 것 보다도 훨씬 많은 배상금을 받은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2015년에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9명의 개인이 고소해서 승소한 사건도 있었다. 서브웨이에는 풋롱(12인치)이라는 메뉴를 파는 데 이 샌드위치를 구입해 치수를 재어보니 빵 길이가 11인치였다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와 논란이 되었다. 9명의 개인이 서브웨이에 과대 광고로 집단소송 해서 보상금을 받은 사건도 있었다.


그렇게 예민한 친구는 아닌데...

유별난 사람들만 이런 소송을 거는 건 아니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하나는 헬스장 건물에 들어가다가 입구에 얼음이 얼어있어 넘어져 타박상을 입게 되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재수없어서(혹은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얼음 밟아 넘어졌네 할 수도 있는 일을 이 친구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헬스장 프론트에 가서 건물 입구 관리를 똑바로 안해서 자기가 넘어졌으니 보상을 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헬스장 측에서는 친구에게 쿠폰과 회원권 등을 제시하고 친구는 이 문제로 고소하거나 더이상 금품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사인을 하고 이 일은 마무리 되었다.


Don't take a bath with a hair dryer!

미국에서 물건들을 살펴보면 소송을 피하기 위한 경고문구들이 가득하다. 수면제에 '이 약을 먹으면 잠이 올 수 있습니다'라고 씌여 있거나, 땅콩 버터에 '땅콩알러지 주의' 문구, 다리미에 붙은 '옷을 입은채 다리지 마세요' 표시, 헤어드라이어에 붙은 '물에 담그면 안됩니다' 표시. 이런 것들은 모두 소송을 피하기 위한 문구들이다. 전자렌지에 고양이를 돌리고서는 전자렌지에 고양이를 넣으면 안된다는 주의 문구를 붙이지 않았다고 고소한 사람도 있다고 하니 정말 혀를 내두를 수준이다.



미국은 기업에 강한 윤리적 책임을 요구한다. 거짓 과장 광고를 했다가는 손해배상을 할 위험이 크고 부도덕한 기업은 그 댓가를 치르게 하는 강력한 법이 있어 준법정신이 투철한 것 같다. 우리 나라는 어떤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미국에 비해 기업윤리가 좀 약하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 우리나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와 미국식 집단소송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법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기업의 도덕성을 좀 더 향상시켜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찬반 논의가 뜨거워 어느쪽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현 실정에 맞게 잘 적용되어 소비자나 개인은 손해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고 기업이 윤리적 책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좋은 방안으로 결론이 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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