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북
시각예술은 텍스트가 중요하다고 한다. 작가가 부여한 어떠한 의미가 작품의 감상 포인트를 결정짓고 관람객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그 의미를 여러 방향성으로 다양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흥미로운 공간에 다녀왔다.
관람일 : 2024.7.24(수)
장소 : 닻프레스/다크룸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 471 CS PLAZA 지하 1층)
닻프레스는 사진예술을 중심으로 출판, 전시, 교육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는 공간이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결과물 등을 북아트, 아트북, 아티스트북으로 만들고 출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곳은 ‘전시‘라는 형태에 갇혀있던 시각예술에 대한 나의 생각을 뒤바꾸는 공간이었다.
보통 전시가 끝나면 작가가 애써서 만든 작품을 소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사진이나 사라지는 형태의 작품은 더 그럴 것이다. 그 희소성이 작품을 더 귀하게 만들기도 하겠지만, 역사를 보존하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듯, 예술작품을 잘 정리하고 기록해 두는 것도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결국에는 예술도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누군가는 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일찌감치 그러한 작업을 시작한 곳이 바로 닻프레스다.
닻프레스는 각종 북페어에 참가하여 작가, 기획자, 디자이너 등의 노고가 담긴 시각 분야 작품집 ‘아티스트북’ 등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아트 북페어에 참가한 닻프레스는 아만다 마찬드(Amanda Marchand), 리아 솝세이(Leah Sobsey)의 <This Earthen Door>라는 작품집을 선보였다. 현장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매출 1위까지 달성했다고 한다.
아티스트북이라는 형태도 생소한데,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다. 바로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이유인데, 시인으로 유명한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를 인용한 것이라 한다.
흙투성이인 우리는
흙으로 된 문까지만 가요 -
문이 열리면 다른 세상이 펼쳐져요 -
우리는 보지 않아요 - 더 이상 이 세상을
- 에밀리 디킨슨 (Fr 845) -
<This Earthen Door>는 에밀리 디킨슨의 식물표본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과 제작 과정,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은 식물을 잘 말려 붙여두고 그 옆에 시를 쓰는 작업을 했었고, 하버드대에서 이 작업물들을 모아 책으로 제작해 두었다. 아만다 마찬드와 리아 솝세이는 그 작품집을 토대로, 디킨슨이 그랬던 것처럼 직접 식물들을 키워서 디지털 필름과 앤토타입(Anthotype) 프린트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코로나 시기에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앤토타입! 너무나 신선하고 신기했다. 종이에 식물즙을 바르고 음화 필름을 둔 상태로 그 종이를 태양 빛에 노출시키는데, 이때 빛을 통해 화학반응이 일어나 종이에 식물 모양이 찍힌다고 한다.
부록에 담긴 것도 평범하지 않았는데, ‘씨앗종이’가 1장 들어있다. 심으면 무언가가 나올 거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 하나 연결성이 끊어지지 않는 생소하고도 경이로운 의도에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10대였던 에밀리가 친구에게 “식물표본집을 한번 만들어봐. 너에게 소중한 보물이 될 거야.”라고 했다는데, 그때 그 친구가 나라면 “응, 해볼래!”라고 답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식물 가꾸기를 다시 열심히 해보고 있는 중이라, 더 관심이 갔다. 홍콩야자와 다육이를 키우다가, 케일, 오이, 오렌지쟈스민을 새로 들여 키우고 있다. 곧 식물집사로서의 내 모습과 성장일지도 소소하게 기록해 볼 생각이다.
온몸에 땀이 범벅이었지만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배우며, 감명받을 수 있었던 오늘. 매일의 일상에서도 오늘과 같은 감동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획의도, 작업방식 등의 내용 출처는 닻프레스 및 아만다 마찬드와 리아 솝세이의 <This Earthen Doo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