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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May 31. 2024

‘속 편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속 편하게’ 단정 짓는 사람은 있습니다

 '속 편하다'는 보통 (태도와 의도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경멸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현실이 얼마나 각박한데', '사는 게 얼마나 녹록지 않은데'라는 말이 '속 편하다'의 앞에 괄호 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이를 내리깔고, 어리숙한 사람으로 낮춥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 '속 편한 사람'을 '계도啓導'해야겠다고 생각하여 '현실'에 대해 가르치려는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속 편하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대게 주눅이 듭니다. '내가 그렇게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나?', '아직도 세상을 잘 모르나?', '나는 어린가?' 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속 편하다'는 주로 '속 편한 소리', '속 편하게 산다'로 표현되는데, 이는 '순진한 생각', '순수한 사람'이라는 표현으로도 대체됩니다. 이를 통해 ‘속 편하다’에는 '성숙함'에 대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숙함’은 무엇일까요? '속 편하다'의 앞에 생략되어 있는, '현실이 얼마나 각박한데', '사는 게 얼마나 녹록지 않은데'라는 생각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성숙함'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속 편하다’라며 미성숙을 나무라는 사람은 사실 '각박한 현실'에서 살기 위해 현실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희생하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속이 상하'고, '속 불편'한데 미성숙한 사람의 '속 편한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어리숙하고 현실을 모르는 순진무구함으로 비추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속 편하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은 자신이 바보 같지는 않은지,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합니다.


 '속 편하다'는 말은 무언가를 평가하는 말로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허무맹랑함과 무관하며 실제로 어떤 말이 허무맹랑하다고 하더라도 '속 편하다'는 말은 쓰일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말이 정말 허무맹랑하다면, 그 생각이 왜 허무맹랑한지 이야기하면 됩니다.




 물론, ‘속 편하다’는 표현이 어떤 말의 허무맹랑함에 대하여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진지하게 고뇌했다고 하더라도, 그저 자기 시각에서 현실적이지 않고, 단순히 이해하기 어렵다면 발화자와 발화자의 생각을 '속 편하다'라고 폄하합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 실제로 '속 편한 사람'은 '속 편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했을 뿐인데, 그 잘못을 상대의 어리숙함으로 돌리는 쉬운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공감하려는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로 편하게 평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속 편하게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속 편하다'라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타의에 의해 순종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속 편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가혹한 현실에 저항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 꿈꾸는 것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속 편하다'는 말에는 '나도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꿈꾸고 싶다'는 '부러움'이 깔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속 편하다'를 대체할 말은 없습니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대한 한탄',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함에 대한 핀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은 모두 그저 흐트러뜨리며 이 표현이 사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속 편하다'라고 단정 짓지 말고, 내가 '속이 상한 것'을 '속 편하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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