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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Jun 07. 2024

‘사실상’이라고 억지 부려봤자

같은 건 같은 거고, 다른 건 다른 겁니다

사실상事實上

(명사)

1. 실제로 있었던 상태. 또는 현재에 있는 상태.

(부사)

1. 실지實地에 있어서

- 표준국어대사전


 '사실상事實上'의 사전적 정의는 지난 글에서 다루었던 '사실事實'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실제 쓰임에서 '사실상'은 부사격으로만 쓰이고 ‘사실’과 뜻도 엄연히 구분됩니다(실제 용례가 잘 반영되지 않는 국어사전의 경직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본문에 들어가기 전, 혼동을 막기 위해 '사실'과 '사실상'의 용례적 의미를 거칠게라도 구분해 보겠습니다. '사실'은 '실제 그 자체'를 지목하는 말이지만, '사실상'은 '엄밀히 그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거의 구분이 안될 정도로 비슷하여, 그것으로 보아도 무방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사실'과 '사실상'은 사실상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같지 않은 것이지요.


 "사실상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같지 않다."


 이것이 이 글에서 '사실상'에 대해 다룰 문제의식입니다.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 제 동료가 다른 부서 소속의 상사에게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리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실상'이라는 단어가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같은 거 아니에요?"


 제 동료가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이것이 그것과 같은 거 아니냐’며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확인받으려 했습니다. 동료는 여러 방법으로 두 개가 다른 이유를 설명했지만, 상사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할 것처럼, '사실상'은 '같지 않은데 같아 보이거나 같은 기능을 하니 같다고 얘기해도 상관없다'고 판단할 때 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상'이 분명하게 '같지 않다'를 전제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지점에서 긴장이 발생합니다. 불일치를 전제하면서 일치로 결론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을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주 이례적인 말하기 방식은 아닙니다. 은유隱喩와 재정의再定義가 대표적으로 다른 것을 같다고 말하는 방식입니다. 은유를 사용한 표현을 살펴보면,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것들을 완전히 같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두 대상 사이의 공통점을 뽑아내어 둘을 연결한 후 나란히 놓아, 표현하는 이가 부각하고 싶은 의미를 다채롭게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은유는 두 대상이 온전히 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재정의'는 훨씬 깊은 층위로 들어갑니다. 다른 두 대상이 알고 보면 같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한 대상의 의미를 완전히 해체한 후 다시 세웁니다. 물론, 다시 세워진 의미는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겠지요. 그래서 은유보다 드물게 사용되고, 주로 학술적인 담론에서 활용됩니다.


 그러나 '사실상'은 은유처럼 전혀 다른 것의 공통점 일부만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재정의처럼 기존의 것을 완전히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미 존재하는 대상들이 본인이 보기에 같아 보일 때 사용합니다. 제가 여기서 '보인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사실상'은 말하는 이의 상대적인 관점으로 인해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실상'은 지극히 주관적 관점에서 부각된 협소한 특징을 공통점으로 판단해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실상'을 활용하여 '같지 않을 것을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은유나 재정의와는 구분됩니다. 은유는 특정 사실을 연결하고 그 지점에 한정 지어 같다고 말하고, 재정의는 의미 차원부터 재구성하여 완전히 같은 것으로 나아가는 수고를 들입니다. 하지만 '사실상'은 말하는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맥락 안에서 두 대상의 공통점이라고 판단되는 일부분에 집착해 전체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실상'은 기사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어쩌면 언론매체에서 가장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정치적 발화에서 주로 활용됩니다. 특정 집단이나 특정 인사의 시각에서 부각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사실상'이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프레임화’합니다. 전혀 다른 것을 끌어와서 논점을 흐리고 상대의 의미를 왜곡시키며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의도적으로 방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주관적 맥락'을 강화하고 설득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사실상 같다'도 쓰이지만, '사실상 다르다'도 많이 쓰입니다.


 심리학에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뇌는 항상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최대한 에너지를 덜 쓰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뇌의 입장에서는, '사실상'을 동원해 '같지 않은 것'을 '같다'고 말하는 시도는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실상'을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지적 게으름'이 누적되었음을 뜻합니다. 상황이나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태도가 반복되면서 생각을 편하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조금이라고 복잡한 사고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죠.


 나아가 ‘사실상’은 대상과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사실상'은 구체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무마시키고, 자신이 가진 상대적 관점에 기대어 이해 가능한 협소한 범주 내로 억지로 끌어들이는 발화입니다. 그 끝은 결국 ‘오해’입니다. 애당초 자신의 관점을 벗어난 이해를 시도하지 않으니 내가 아닌 것과 내가 참여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이라는 단어로 우리는 다른 것 사이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해 꿰뚫어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오히려 어느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사고방식 내에서 다른 것들을 끼워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사실상’도 불필요한 표현입니다. 어떤 특징이 같다면 그 지점이 같다고 이야기하면 됩니다. 굳이 다른 것까지 같다고 뭉뚱그려질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것은 같다고, 다른 것은 다르다고 분명하게 표현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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