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로 풀어보는 재미있는 고사성어
점입가경(漸入佳境), 언제부턴가 미디어에서 이 성어가 자주 보이기 시작하더라. 처음엔 참 어색한 단어였는데… 실은 꼭 이 성어만이라기보다 전체적으로 사자성어의 활용이 많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막이 주된 재미 요소로 부각되면서 다양한 사자성어의 활용 사례가 늘었달까. 사자성어의 매력은 할 말 많은 자질구레함을 깔끔 명료하게 단 네 글자로 정리해 주는 데 있을 테다. 이러한 한자 고유의 특징이 자막의 시대가 오자 제대로 빛을 발하더라는 얘기다.
이제 ‘점입가경(漸入佳境)’ 이 성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표현은 무엇인가? ‘갈수록 태산’? 맞다. 확실히 뭔가 상황이 악화되는 그런 부정적 느낌이 짙은 것 같다. 사전에 나와있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는 짓이나 몰골이 더욱 꼴불견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정의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런 뉘앙스였을까? 이 성어가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니 원래는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됨’을 의미하는 거였더라.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뉘앙스가 하나의 표현에 다 있네. 뭐 이런 단어가 한둘이겠냐만, 그래도 이 성어가 나온 배경을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점차 점(漸), 들 입(入), 아름다울 가(佳), 지경 경(境)
‘점입(漸入)’이란 ‘점점 들어간다’는 뜻이다. ‘가경(佳境)’은 ‘아름다운 경지’다. 그러니 전체 뜻은 ‘점차 아름다운 경지로 들어간다’는 뜻이 될 테다. 이 성어의 출전은 <진서(晉書)>다. 이 책은 방현령(房玄齡) 등이 진(晉) 왕조의 정사(正史)를 기록한 것이다. 바로 양귀비의 남자, 당나라 태종의 지시에 따라서 편찬한 책이렷다. ‘우리에게 그나마 익숙한’ 이름을 이렇게 슬그머니 투척하는 이유? 이번 고사도 온통 낯선 이름들뿐이라서.
암튼! 점입가경(漸入佳境)은 <진서(晉書)> 중에서도 “고개지전(顧愷之傳)”에 전한다. 고개지(顧愷之)라고? 그렇다. 중국 동진(東晉)의 화가 이름이 고개지다. 또 ‘듣보잡’이라고 타박하지 말라. 이렇게 한 명씩 알아가는 거지 뭐. 고개지라는 사람은 초상화 같은, 옛 인물들을 묘사하는 데 아주 뛰어나서 중국회화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고. 동시대의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던 왕희지(王羲之)와 함께 당대 예술계의 투톱이었단다. 이 사람도 나름 유명했다고요.
인물화의 대가셨던 고화백님은 사탕수수(甘蔗)를 즐겨 드셨단다. 그는 그러니까 시쳇말로 ‘민초파’ 아니고 ‘사수파’였던 거다. 근데, 이 ‘사수파’의 먹는 방식이 좀 특이하더란다. 사탕수수를 늘 줄기부터 먹더라나. 대체 왜 그렇게 먹느냐고 물으니, 그가 한 대답이 바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가만~ 맥락이 좀 뜬금없는 것도 같고. 사탕수수를 왜 거꾸로 먹냐니까 ‘점점 아름다운 경지로 들어간다’고?
그래서 또 찾아봤다.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런 대답이 나왔는지를. 저 대화 바로 앞에서 고개지는 수많은 빼어난 산봉우리며 힘차게 흐르는 강물을 예찬하던 중이었더라. 초목의 무성함을 보고는 마치 구름과 노을이 피어오르는 듯 찬란하다는 둥 하며 말이지. 그 와중에서 사탕수수를 왜 그렇게 먹냐는 질문에 ‘점입가경(漸入佳境)’!! 딱 단어 하나로 모든 걸 설명했더라.
그가 사탕수수를 줄기부터 먹는 이유는 ‘갈수록 점점 단맛이 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던 거다. 그에겐 ‘단맛’이 바로 ‘가경(아름다운 경지)’이었네. 이 고사로부터 ‘점입가경’은 자연경관이 점점 더 멋져지거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이 갈수록 더 재밌어지는 상황을 뜻하게 된 것이란다. 줄여서 가경(佳境)이라고도 하고. 음… 그렇군!
이 의미가 확장되면서 ‘가경(佳境)’은 더 이상 꼭 좋은 상황만이 아닌 모든 경우를 다 포함하게 되었던가 보다. 어쩌다 부정적 상황에서 한 번 쓰이게 되면서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그 이미지가 굳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점입가경’하면 바로 ‘산 너머 산’ 혹은 ‘갈수록 태산’이란 속담이 떠오르는 게 자연스러워진 게다.
언어란 그런 거더라. 고정된 의미는 없으며 맥락에 따른 해석만이 있더라. 언중(言衆)이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말은 얼마든지 변주될 수 있음이다. 그래서 언어는 그 오랫동안 철학의 중심 화두이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말이란 정말 신중해야 하는 건데… 이 타이밍에 갑자기 드는 생각!! 좀 엉뚱한 소리 같지만, 우리가 평소 아무 고민 없이 뱉어버리는 말들에 대한 모종의 책임감이 스멀스멀.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이 어수선한 혼돈의 시국에 딱 맞는 성어가 아닐까 하여.